크게 별다른 일은 없는 날이었다. 외주 작업에다 주중에 밀린 일이 많아 사무실은 숨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난 밤을 꼬박 새운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요컨대 평소와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아예 이상한 날도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휴게실을 독점해 쓰러지다시피 소파에 기대 있던 난 노크 소리에 연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을 때 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문을 열기 위해서였던지 입에 문 컵을 다시 손에 들고 있는 ‘나’는 의외로 부끄럼을 타는 듯 보였다. 며칠을 일에 찌들어 완전히 지쳐버린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발끝으로 톡 차서 문을 닫고 들어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놀란 내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나를 향해 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짓기에는 굉장히 포근해보이고 낯간지러운 미소였다.
“이거, 2층 자판기 밀크커피에요. 마셔요.”
“아.”
얼빠진 소리를 내고선 난 허겁지겁 커피를 받았다. 이렇게 작업이 밀려올 때면 나는 설탕이 한소끔 더 들어간 듯한, 2층 자판기의 밀크커피 이외에는 입에도 대질 않았었다. 나랑 입맛도 비슷할까? 이 버릇은 누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겉모습은 거울 속에서 내가 바라보던 나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내 맞은편에 앉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누구?”
뭔가 기세에서 밀렸다.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너무 얼빠진 모습으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나’는 눈을 나와 맞추더니 방긋 웃음을 지었다. 보는 내가 짜증이 날 만큼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미소였다.
“난 ‘나’에요.”
“……하?”
“난 ‘나’라고요.”
“내가 누군데요?”
“당신이요.”
“지금 당신, 당신이 나라고 주장할 참이에요?”
“정답. 나, 도플갱어거든요.”
어린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건네는 그녀의 눈은 둥그스름하게 휘어졌다. 웃는 모습이 속을 이렇게 뒤집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홧김에 손에 꽉 틀어쥐고 있던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달콤한 인스턴트커피가 목으로 넘어가고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난 종이컵을 구겨 손에 꽉 쥐었다. 눈을 마주치자 ‘나’는 살풋 상기되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아, 그렇죠. ……안놀라요?”
내 무덤덤한 반응에 실망한건지 그녀는 시무룩한 모습이 되었다. 그녀가 들어올 때부터 눈치 챈 상태였지만 그녀는 내가 좀 더 놀라주길 바랬던 것 같았다. 그녀는 머쓱하게 약간의 놀라움이 어린, 하지만 어린 아이가 맘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처럼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놀라네요. 사실 좀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너무 담담하게 물어보니까 오히려 내가 기분이 이상해요.”
“내가 놀라고 당황해봐야 당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입을 열자 그녀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말을 가로막았다.
“네,네. 알았어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여라, 이거잖아요? 알고는 있지만 너무하네.”
……기분 나빠질 정도로 그녀는 내 생각을 맞추고 있었다. 아마 더 이상 그녀와 나의 차이점을 찾아보려고 해도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문득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실실 웃었다. 정체성을 부정당한 기분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먼저 운을 뗀 것은 나였다.
“당신, 나 죽여야 하지?”
그리고 돌아오는 즉답.
“그래요. 난 당신을 죽여야 해요.”
“어째서?”
“당신은 고장 났거든요.”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늘어져 천장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 탓에 첫단추를 풀어놓은 블라우스가 벌어져 목덜미에 남은 하얀 흉터가 드러났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멋진데, 저 것까지 똑같이 만들다니 정말 누가 봐도 ‘저게’ 원래의 내가 아니라는 것은 모를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는 고개를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당신의 정확한 운명은 나도 잘 모르지만 남은 시간이 있는데도 그 몸의 당신은 조만간 죽어요. 그래서 내가 태어났죠. 난 당신의 대체품이에요.”
“태어났다기보다는 발생했다, 만들어졌다가 훨씬 자연스럽지 않아 당신?”
내가 신랄한 말투로 한껏 비꼬아대도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도플갱어의 교체 현상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곱게 끝나지 않고 도망가고 소문을 내죠. 만난 뒤에 죽었다는 건 그 사람은 도플갱어를 피해 도망쳤다가 실패했다는 거예요. 뭐, 피해봐야 소용없는 ‘운명’이니까요. 그래서 보통은 조용히 교체작업으로 끝나죠.”
“……그럼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죠. 누가 알겠어요?”
저런 말을 들으면 무척 기분이 나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무덤덤하다.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내가 해보고 싶던 것이 있었던가 생각해보게 됐다. 맞다, 어느 순간부터 난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 때부터 이미 미래가 없었던 것일까.
“당신은 곧 죽어요.”
“그렇겠죠, 당신 손에.”
“뭐, 그렇죠. 당신, 사고 당해요. 옥상에서 낙사로. 하지만 ‘난’ ‘운 좋게도’ 가벼운 골절상으로 끝나요.”
“내가 당신 손에서 안죽는다면?”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 잠시 피하더라도 난 당신이 있는 곳에 계속 쫓아갈테니까.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어디까지나 침착해보였다. 그녀는 자세를 바꿔 나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선택을 종용하는 얼굴을 피하기 위해 난 반대로 등받이에 늘어지게 기댔다. 어차피 결단을 내려야할 때였다. 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가지. 이왕이면 날씨 좋으면 좋겠네.”
옥상에 올라가는 건 생각 외로 쉬웠다. 휴게실이 외진 곳에 있는 덕에 대부분은 잘 쓰지 않는 뒤쪽 계단으로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고 옥상으로 몇발 내딛자마자 때맞춰 비가 내렸다.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인데. 좀 더 밝은 빛깔로 맞아줘도 좋았을 것을. ‘나’는 나에게 다가왔다.
“죽어주세요.”
그리고 즉답.
“싫어.”
‘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의외로 맘에 드는 얼굴이었다. 내가 짓기는 싫은 찡그린 얼굴. 이번엔 내가 그녀가 지금까지 지어보였던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얼굴로 잘도 그런 미소를 지었다 싶었다. 시선이 느껴진다. 필시 ‘나’는 고개를 나로 향하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해요. 이해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여기에 올라오자고 한건가요?"
“……당신은 두 번째 나야.”
나는 ‘나’에게 한발짝 다가갔고 그녀는 내게서 두발짝 물러났다. 아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으리라. 나는 비로 젖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걷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황이 어린 표정은 묘하게 날 우월감에 젖게 만들었다. 난 말을 계속했다.
“날 찾아온 ‘나’는 당신이 처음이 아니란 소리야. 알았어? 도플갱어.”
인칭은 좀 이상하지만 내 눈은 다시금 휘둥그레 뜨였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듯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의 뒷말을 뺏었다. 빗소리에 그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처음에 나보고 죽어달라고 찾아왔던 ‘나’의 눈에 비친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별로 가슴이 아프거나 불쌍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얗게 돋아있을 내 상처를 매만졌다. 그 때는 당황해서 저질렀던 살해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난간까지의 거리는 가까웠다.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했다. 그녀에게 다가가며 머리 속에는 그녀를 밀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자살과 타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죄책감은 필요 없는 감정으로 느껴졌다.
“당신과 나는 동일인물이야. 그렇다면, 당신을 내 운명에 대신 끼워넣고 내가 당신이 되면 그만인 것 아니겠어?”
“……!”
팔을 뻗어 그녀를 난간에 밀어붙였다. 난간 너머로 넘어가지 않으려 내 팔 밑에서 버둥대는 그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나에게 넘어왔다. 잡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녀는 나대신 죽어야하는 ‘소모품’이 되어줘야만 했다. 그녀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화사하게 미소지어주었다.
“잘 가.”
그녀와 함께 떨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서 우리는 서로의 뺨을 할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으며 사납게 덤볐다. 하지만 그 순간이 그녀와의 짧은 만남 중 가장 유쾌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묵직한 것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둔한 울림이 온 몸을 강타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희미하게 귓가로 흘려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너무 무리한 듯 싶었다. 잠시 눈을 붙여도 되겠지.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뜨자 나는 하얀 천장을 위에 두고 누워있었다. 어머니는 간이 침대에 앉아 계시다가 내가 깨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오셨다. 그리고 몰려오는 잔소리. 도대체 얼마나 무리를 했으면 옥상에서 정신을 잃어 떨어지느냐, 천운이 도와 가벼운 골절로 끝난 것으로 알아라. 그 잔소리들을 한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그 때의 상황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녀는 내 밑으로 떨어졌고 이미 그 전부터 흐물흐물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본 그녀는 빗물에 씻겨 사라져가며 일그러지고 부서진 눈동자로, 뭉그러진 입술로 끊임없이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난 살아남았다.
난 고장난 부품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앞으로 몇 번을 ‘나’가 나를 찾아올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난 곱게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는 내 자신을 죽이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운명은 잔인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보다 잔인해지면 그만인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순순히 당해주고싶지 않았다.
“엄마.”
다행히도, 지금은 하고싶은 일이 생각났다. 난 녹아내린 내가 지었던만큼 고운건 아니지만 방긋이 웃었다. 이번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나, 결혼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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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초에 수정 완료. 저작권은 나한테 있음.
크게 별다른 일은 없는 날이었다. 외주 작업에다 주중에 밀린 일이 많아 사무실은 숨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난 밤을 꼬박 새운 탓인지 머리가 띵했다. 요컨대 평소와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아예 이상한 날도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휴게실을 독점해 쓰러지다시피 소파에 기대 있던 난 노크 소리에 연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을 때 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문을 열기 위해서였던지 입에 문 컵을 다시 손에 들고 있는 ‘나’는 의외로 부끄럼을 타는 듯 보였다. 며칠을 일에 찌들어 완전히 지쳐버린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발끝으로 톡 차서 문을 닫고 들어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놀란 내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그녀는 나를 향해 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짓기에는 굉장히 포근해보이고 낯간지러운 미소였다.
“이거, 2층 자판기 밀크커피에요. 마셔요.”
“아.”
얼빠진 소리를 내고선 난 허겁지겁 커피를 받았다. 이렇게 작업이 밀려올 때면 나는 설탕이 한소끔 더 들어간 듯한, 2층 자판기의 밀크커피 이외에는 입에도 대질 않았었다. 나랑 입맛도 비슷할까? 이 버릇은 누가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겉모습은 거울 속에서 내가 바라보던 나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내 맞은편에 앉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누구?”
뭔가 기세에서 밀렸다.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너무 얼빠진 모습으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나’는 눈을 나와 맞추더니 방긋 웃음을 지었다. 보는 내가 짜증이 날 만큼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미소였다.
“난 ‘나’에요.”
“……하?”
“난 ‘나’라고요.”
“내가 누군데요?”
“당신이요.”
“지금 당신, 당신이 나라고 주장할 참이에요?”
“정답. 나, 도플갱어거든요.”
어린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건네는 그녀의 눈은 둥그스름하게 휘어졌다. 웃는 모습이 속을 이렇게 뒤집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홧김에 손에 꽉 틀어쥐고 있던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달콤한 인스턴트커피가 목으로 넘어가고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난 종이컵을 구겨 손에 꽉 쥐었다. 눈을 마주치자 ‘나’는 살풋 상기되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아, 그렇죠. ……안놀라요?”
내 무덤덤한 반응에 실망한건지 그녀는 시무룩한 모습이 되었다. 그녀가 들어올 때부터 눈치 챈 상태였지만 그녀는 내가 좀 더 놀라주길 바랬던 것 같았다. 그녀는 머쓱하게 약간의 놀라움이 어린, 하지만 어린 아이가 맘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처럼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놀라네요. 사실 좀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너무 담담하게 물어보니까 오히려 내가 기분이 이상해요.”
“내가 놀라고 당황해봐야 당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입을 열자 그녀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말을 가로막았다.
“네,네. 알았어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여라, 이거잖아요? 알고는 있지만 너무하네.”
……기분 나빠질 정도로 그녀는 내 생각을 맞추고 있었다. 아마 더 이상 그녀와 나의 차이점을 찾아보려고 해도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문득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실실 웃었다. 정체성을 부정당한 기분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먼저 운을 뗀 것은 나였다.
“당신, 나 죽여야 하지?”
그리고 돌아오는 즉답.
“그래요. 난 당신을 죽여야 해요.”
“어째서?”
“당신은 고장 났거든요.”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늘어져 천장을 바라보는 듯 했다. 그 탓에 첫단추를 풀어놓은 블라우스가 벌어져 목덜미에 남은 하얀 흉터가 드러났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멋진데, 저 것까지 똑같이 만들다니 정말 누가 봐도 ‘저게’ 원래의 내가 아니라는 것은 모를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는 고개를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당신의 정확한 운명은 나도 잘 모르지만 남은 시간이 있는데도 그 몸의 당신은 조만간 죽어요. 그래서 내가 태어났죠. 난 당신의 대체품이에요.”
“태어났다기보다는 발생했다, 만들어졌다가 훨씬 자연스럽지 않아 당신?”
내가 신랄한 말투로 한껏 비꼬아대도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도플갱어의 교체 현상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곱게 끝나지 않고 도망가고 소문을 내죠. 만난 뒤에 죽었다는 건 그 사람은 도플갱어를 피해 도망쳤다가 실패했다는 거예요. 뭐, 피해봐야 소용없는 ‘운명’이니까요. 그래서 보통은 조용히 교체작업으로 끝나죠.”
“……그럼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죠. 누가 알겠어요?”
저런 말을 들으면 무척 기분이 나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무덤덤하다. 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문득 내가 해보고 싶던 것이 있었던가 생각해보게 됐다. 맞다, 어느 순간부터 난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 때부터 이미 미래가 없었던 것일까.
“당신은 곧 죽어요.”
“그렇겠죠, 당신 손에.”
“뭐, 그렇죠. 당신, 사고 당해요. 옥상에서 낙사로. 하지만 ‘난’ ‘운 좋게도’ 가벼운 골절상으로 끝나요.”
“내가 당신 손에서 안죽는다면?”
“그럴 일은 없어요. 지금 잠시 피하더라도 난 당신이 있는 곳에 계속 쫓아갈테니까.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어디까지나 침착해보였다. 그녀는 자세를 바꿔 나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선택을 종용하는 얼굴을 피하기 위해 난 반대로 등받이에 늘어지게 기댔다. 어차피 결단을 내려야할 때였다. 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가지. 이왕이면 날씨 좋으면 좋겠네.”
옥상에 올라가는 건 생각 외로 쉬웠다. 휴게실이 외진 곳에 있는 덕에 대부분은 잘 쓰지 않는 뒤쪽 계단으로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고 옥상으로 몇발 내딛자마자 때맞춰 비가 내렸다.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인데. 좀 더 밝은 빛깔로 맞아줘도 좋았을 것을. ‘나’는 나에게 다가왔다.
“죽어주세요.”
그리고 즉답.
“싫어.”
‘나’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의외로 맘에 드는 얼굴이었다. 내가 짓기는 싫은 찡그린 얼굴. 이번엔 내가 그녀가 지금까지 지어보였던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얼굴로 잘도 그런 미소를 지었다 싶었다. 시선이 느껴진다. 필시 ‘나’는 고개를 나로 향하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해요. 이해한 것 아니었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여기에 올라오자고 한건가요?"
“……당신은 두 번째 나야.”
나는 ‘나’에게 한발짝 다가갔고 그녀는 내게서 두발짝 물러났다. 아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으리라. 나는 비로 젖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걷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황이 어린 표정은 묘하게 날 우월감에 젖게 만들었다. 난 말을 계속했다.
“날 찾아온 ‘나’는 당신이 처음이 아니란 소리야. 알았어? 도플갱어.”
인칭은 좀 이상하지만 내 눈은 다시금 휘둥그레 뜨였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듯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의 뒷말을 뺏었다. 빗소리에 그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처음에 나보고 죽어달라고 찾아왔던 ‘나’의 눈에 비친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별로 가슴이 아프거나 불쌍해보이지는 않았다. 하얗게 돋아있을 내 상처를 매만졌다. 그 때는 당황해서 저질렀던 살해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난간까지의 거리는 가까웠다.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했다. 그녀에게 다가가며 머리 속에는 그녀를 밀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자살과 타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죄책감은 필요 없는 감정으로 느껴졌다.
“당신과 나는 동일인물이야. 그렇다면, 당신을 내 운명에 대신 끼워넣고 내가 당신이 되면 그만인 것 아니겠어?”
“……!”
팔을 뻗어 그녀를 난간에 밀어붙였다. 난간 너머로 넘어가지 않으려 내 팔 밑에서 버둥대는 그녀의 체온이 고스란히 나에게 넘어왔다. 잡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녀는 나대신 죽어야하는 ‘소모품’이 되어줘야만 했다. 그녀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화사하게 미소지어주었다.
“잘 가.”
그녀와 함께 떨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서 우리는 서로의 뺨을 할퀴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으며 사납게 덤볐다. 하지만 그 순간이 그녀와의 짧은 만남 중 가장 유쾌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묵직한 것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둔한 울림이 온 몸을 강타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희미하게 귓가로 흘려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너무 무리한 듯 싶었다. 잠시 눈을 붙여도 되겠지.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뜨자 나는 하얀 천장을 위에 두고 누워있었다. 어머니는 간이 침대에 앉아 계시다가 내가 깨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오셨다. 그리고 몰려오는 잔소리. 도대체 얼마나 무리를 했으면 옥상에서 정신을 잃어 떨어지느냐, 천운이 도와 가벼운 골절로 끝난 것으로 알아라. 그 잔소리들을 한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그 때의 상황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녀는 내 밑으로 떨어졌고 이미 그 전부터 흐물흐물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본 그녀는 빗물에 씻겨 사라져가며 일그러지고 부서진 눈동자로, 뭉그러진 입술로 끊임없이 나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난 살아남았다.
난 고장난 부품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다. 앞으로 몇 번을 ‘나’가 나를 찾아올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난 곱게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는 내 자신을 죽이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운명은 잔인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보다 잔인해지면 그만인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순순히 당해주고싶지 않았다.
“엄마.”
다행히도, 지금은 하고싶은 일이 생각났다. 난 녹아내린 내가 지었던만큼 고운건 아니지만 방긋이 웃었다. 이번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나, 결혼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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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초에 수정 완료. 저작권은 나한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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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다시 보자
아이고 조잡해라
필치는 바뀌질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