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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7

망상극장/미분류 2018. 5. 29. 14:23

가느다란 숨을 흩었다. 발끝을 휘저어 찬 공기를 헤집고, 가슴을 내밀고, 앞으로. 색없이 부옇기만 한, 냉기에 언 숨이 부서지고, 또 일고. 어스름한 빛을 흘리는 달빛을 어깨에 걸친 나는 여기에 오롯이 홀로 서있어서 눈물 하나 흘리지 않았다.

주머니에 처박다시피 한 손을 주먹쥐었다.조금만 부딪혀도 냉기에 언 손은 유리조각 흩어지듯이 와장창, 그리고 우수수, 쏟아내릴 것이다. 내 살덩이와 피가 섞인 얼음조각들은 이 어스름에도 빛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얼어붙은 손을 꺼내 서로 세게 부딪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외투의 세운 깃에 목을 쑤셔박는다.

너를 잊는 것을 꿈꿨었다. 너를 놓는 것을 망상했다. 그 모든 것이 허튼 짓이었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밤을 헤메며, 네 뒷자락 하나라도 붙들기 위해 떠도는 것이다. 발 끝이 얼어붙고, 손 끝이 바스러지고, 외투는 하등 쓸모가 없고, 이리도 날은 춥고, 내가 너를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웁고.눈을 한번 깜,빡, 감았다가 뜨면, 네가 한땀 수 놓여졌다가, 또 그대로 부서진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보기 위해 눈을 오롯이 감아버리면, 그 어둠에 주르륵 녹아 흩어지고야 만다. 너를 보기 위해, 에는 찬바람을 헤집으며 나는 눈을 또 깜,빡, 깜, 빡. 낡은 가로등의 불빛인 양 흐린 네가 내 눈 안쪽에서 깜, 빡, 깜, 빡. 그 곳에서, 내 가슴 안에서 너는 봄꽃 흐드러지듯이 웃고있어서, 아 내 사랑스러운 사람아. 너는 내 다시 없을지도 모를 봄이었는데 어찌 나는 이리도 찬 겨울을 헤메고 있나. 어째서 나는 바람에 베이며 따스한 당신을 찾아서 발을 옮기고, 또 옮기고 있나.

도타운 외투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내 목을 거북이처럼 구겨도 쓸모가 없다. 네가 없어 춥다. 네가 없어 서럽다. 네가 없어 그저 시리다. 네가 없다. 그것만으로 내가 이리도 망가져 여기저기 떠돌며 네 꿈만 꾸는 것이다. 어째서 너는 내 곁에 없느냐고, 어디로 갔느냐고 우짖어도 네가 없다. 피가 맺히도록 외쳐보기도 했다. 짐승처럼 짖으며 너를 찾아보기도 했다. 너를 찾을 수만 있다면야, 내 손이 다 부르트고 내 목이 다 쉬어 갈라져도, 아니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다니더라도, 내가 너를 찾을 수만 있다면야 그것이 하등 무슨 상처가 된다는 말이냐. 내가 너를 찾을 수 있다면야 그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이냐.

그것이 당신이 내게 안겨주었던 한껏 흐드러진 봄날같아 그 모양을 보며 울었다. 그 모양을 보며 웃었다. 눈물대로 굳어버린 내 얼굴의 두줄기 얼음이 투두둑 부서져 바닥에 흩어진다. 살점이 뜯어지는 느낌이 난다. 내 비참함이 추위에 얼어 흩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또 나는 당신을 찾아 몸을 일으키고, 여기를 헤메고, 저기를 헤집고, 발끝을 휘청이고, 당신을 떠올리며 웃다가, 또 울다가. 내 어리석음에 당신을 잃었느냐고 자책하고, 왜 나를 두고 떠나갔느냐고 당신을 원망하고, 이제는 가슴도 얼어붙었는지 건드리면 와르륵 무너질 것 같이 차다.

내 봄날, 내 아침, 내 향기로운 꽃, 내 소담스런 사람아, 아니, 그 모든 말을 갖다붙여도 소용이 없는 내 사랑하는 사람아. 내 가슴이 다 에도록 당신을 찾는데, 가슴에 눈물이 엉겨붙어 부서지는데, 이리도 추운데, 갈라지는 내 손 한번 부여잡아주지 않고 당신은 예 어디를 헤메고 있나. 하다못해 당신 있는 곳에 발자국이라도 남겨라. 그대 헤메는 곳에 눈물로 얼음꽃이라도 피워라. 내 이리 붉은 길을 피우고 다니는데 당신은 왜 나를 찾지 못하나. 혹은 찾지 않는 것인가. 내 그대야, 내 사랑아, 내 당신아, 내 하나밖에 없는, 아아. 이름 잊지 못할 나의, 무엇.

이제 내가 당신에게 매달려 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그대야, 눈 앞에 없는, 이 어두운 추위에 하얀 수탕나귀 타고 떠나고 있을 나의 나타샤, 내 손발이 다 얼어 부서져도 상관이 없으니 그대가 날 찾아주기만 한다면 여한이 없다. 아니 찾지 말아라. 그냥 그 자리에 서있기만 해다오.그저 내가 당신을 찾을 때까지 새하얗게 빛나는 비석처럼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있어주기만 하면, 내가 기어코 당신을 찾아낼 때까지 참아줄 수 있는 따스함이 한줌 남아있다면 좋을텐데. 그럼 내가 당신을 찾으면, 내 갈라진 입술이라도 당신의 발등에 뜨거운 입을 맞출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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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7

망상극장/미분류 2018. 5. 29. 14:19

꿈을 꿨다. 네 꿈을 꿨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네 꿈을 꿨다. 푸르스름한 새벽에 일어나, 눈을 비비고 마른 입에 물 한모금을 삼켰다. 벽에 등을 대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등에 닿은 벽이 차서 울었다. 정말이다. 네가 그리워서, 보고싶어서, 그런 가당찮은 이유들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다. 등이 차서 울었다. 몸서리나도록 시려서 울었다. 영영 보고싶지 않은 너 때문에 내가 왜, 이 푸르스름한 새벽에, 단잠을 깨고 앉아 눈물을 흘려야하나.

나는 너를 하나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했다. 그러고싶다.

시린 어깨와 발을 이불에 다시 감추고, 나는 베개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뺨을 부빈다. 이불을 단단히 여미고, 눈을 감는다. 다시 눈 앞에 어스름히 어둠이 가라앉는다. 거기에 잠긴다. 나는 오늘 깨지 않았다. 나는 오늘 단잠만 잤다. 오늘 나는 너를 생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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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옴니움의 핵 융합로 습격 사건을 기억하는가? 그 사건 이후로 호주는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호 주 내륙에서 예전의 풍경은 영영 찾아볼 수 없었다. 파괴돈 옴니움의 뒤틀린 파편과 잔해로 어질러 진 그 곳은, 더이상 그 무엇도 살 수 없는 황량한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곳에도 생존자는 있었다. 자신을 '쓰레기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옴니움에서 나온 쓰레 기를 수집하며 어둠 속에서 극악무도한 무법 사회를 형성했다. 정상을 차지하는 자도 있었고, 쫓기는 자도 있었으며, 쫓는 자도 있었다. 그 그늘 아래 숨을 죽이고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을 감사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목숨을 잃는 사람은 셀 수도 없다.

과연 그 곳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응애, 응애…….

처음에는 발정난 고양이의 울음 소리인가 했다. 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칠고 주름진 손을 가진 여자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 나는 쪽을 향해 손에 잡히는 쓰레기를 집어던졌다. 여자의 등은 가볍게 굽었고 지저분한 머리칼은 헝겊으로 겨우 묶은 모양새만 하고 있었다. 넝마라고 불러도 좋을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의 등에는, 옷과 다를 바가 없어보이는 커다란 바구니가 메여 있다. 그녀의 오늘의 수확은 시원찮았다. 아직 제 몸을 팔지 않는 긍지 정도는 남아있었지만 그것은 과연 긍지였을까. 단순히 더러운 여자를 어떻게 해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내일 모르는 남자에게 자빠뜨려져도 그녀를 구해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찌 되었던 여자는 남에게 기대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고, 그 댓가로 빈곤했다. 호주의 밑바닥, 이 '쓰레기촌'에서 여자는 살아남는 방법만을 알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랬을 것이었다.

……응아아, 응애…….

집어 던진 무엇인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놀랐는지 잠시 주춤했던 '울음소리'는 사그러들지 않고 다시 울렸다. 그때 여자는 문득 깨달았다. 이건 '아기'의 울음 소리구나. 하지만 연이어 떠오르는 생각. 그래서 뭐? 그야말로 '무법지대'인 여기에서 부모 모를 아이를 유기한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자신이 돌아다니는 쓰레기장에서는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을 가질 이유가 되지는 않을터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는 살아남는 방법만을 익혔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득 여자는, 궁금해졌다.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가 자신이 지내는 마을에 울리기라도 하면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였던 그녀였음에도 궁금증이 일었던 것을 그녀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회고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울음소리에 스스로 다가갔다.

배냇머리가 까맣게 머리를 뒤덮고 있었다. 온 얼굴을 힘껏 구기고, 벌개지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쓰레기장에 어울리지도 않게 깨끗한 천으로 싸여있다. 일부러 그런 곳에 놓아둔 듯, 여기저기서 쓰레기를 뒤져와 아이가 편하도록 자리를 잡아둔 성 싶었다.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버린 주제에 정성도 들여놨네. 쓰레기 자식들. 여자는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아이를 보자기 째로 안아들었다. 젖비린내가 코 끝을 간질인다. 아이는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보자, 어린 아이를 어떻게 달래더라. 없는 지식을 머리 속에서 마구 긁어모은 여자는, 고심 끝에 천천히 아이를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아는 곡은, 낡은 오디오에서 들려오던 딱 한곡 뿐.

Edelweiss, Edelweiss…….
Every morning you greet me…….
Small and white, clean and bright
You look happy to meet me
Blossom of snow may you bloom and grow
Bloom and grow forever
Edelweiss, Edelweiss…….
Bless my homeland forever…….

천천히 눈을 맞추고, 품 안에 따스함을 안고,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무엇이 부끄러웠는지 여자는, 첫 두어 소절 말고는 눈을 꼭 감았다. 그저 노래를 불러주며, 아이를 천천히 흔들며, 아이가 울음을 그치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눈을 뜨고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온 얼굴이 빨갛다. 아마 우는 데에 온 힘을 다하느라고 힘을 준 탓이겠지. 아직도 눈매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물 자국으로 온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아기는 방긋이 웃고 있었다.

……뭐, 어쩔 수 없네.

여자는 아이를 안아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오늘의 수확은 시원찮았다.

아주, 시원찮았다.



거의 문을 걷어차듯이 송이 들어왔다. 등에는 쓰레기장에서 챙겨온 쓰레기들이 그득했다. 어깨에서 짐을 내려 내려놓자, '쿵'하고 바닥이 울렸다. 오늘도 알차게 주워온 모양이었다. 아아- 무거워! 송은 온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엄마."
"왜 그러니, 송?"
"옆집 테드가 돈 줄테니까 한번 자자고 했어."
"그 빌어처먹을 새끼가 나한테 두들겨 처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차렸다니?"
"그래서 내가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주고 왔어. 이번엔 제대로 터졌으면 좋겠는데."
"엄마도 그건 기대되는구나."
"내가 좋으면 고백이라도 해보고 차이면 될텐데."
"그게 사람의 멍청한 점이란다. 자존심을 버리면 뭐라도 될텐데."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송은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짧은 머리에 얹힌 흙먼지를 툴툴 터는 소녀. 십년이 넘는 세월은 우는 아이도 제법 커다란 여자아이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니 이제는 한 사람의 엄마가 된 여자, 아니 재닛은 송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엄마한테 할 이야기가 뭐야?"
"-음, 엄마. 좀 화낼지도 몰라."
"말이나 들어보자. 화내는건 그 뒤에 결정할테니까."
"그럼 좀 따라와봐."

앉은지 몇분이나 됐다고 송은, 엄마의 손을 이끌고 쓰레기장으로 뛰어갔다. 제 말대로 혼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는, 감출 수 없을 만큼 부푼 고양감이 있었다. 재닛도 알고있었다, 저 아이가 최근 집 밖으로 몰래몰래 돌며 뭘 만들고 있다는 정도는. 다만 송이 천을 끌어내렸을 때, 자신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었음에 몹시도 당황했다.

"송, 이게, 엄마가 보는게 맞다면- 어……."

송은 쑥스럽게 웃었다.

"응, 좀 오래 걸리긴 했지만 구동 테스트까지 다 끝냈어. 제법 비슷하지 않아?"


송이 손바닥으로 탕 내려친 그것은, 언젠가 TV에서 봤던 '한국'의 대 옴닉용 무인 로봇과 빼다박아 있었다. 다만 그것과 다른 점이라면, 아마도 A.I.가 탑재되어있어야 할 위치에 사람이 타야 할 것 같은 모양의 운전석이 놓여져 있다는 것과, 그곳을 가로막고 있어야할 강화유리 장갑이 없다는 것. 

"그래, 무척 닮았는데……. 어떻게 만든거야?"

"뭐, 쓰레기장에서 주운거랑, 엄마 몰래 좀 빼돌린거랑, 프레드나 조지한테 얻은 것도 좀 있고, 아. 발사하는건 진짜 탄은 아니야.  그냥 고무탄이야 저건. 탄창이 제한되는건 아쉽지만 뭐 그정도면 양호하잖아? 물론 내가 원하면 바꿀 수도 있고!"

한껏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딸을 가만히 지켜보던 재닛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 가짜 MEKA를 어디다 쓸 생각이니? 송."
"-어, 바로 그게 문제야 엄마."

방금까지 의기양양해서 말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송은 어깨를 꼬았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재닛의 머리속이 핑핑 돌아간다. 저걸 혹시 정크랫같은 놈들에게 팔기라도 했나? 빼돌린 군수물품이라고 비싸게 팔아먹기라도 했나? 아니면, 저걸 만들기 위해서 도둑질이라도 했나?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수습하지? 이 고집쟁이 딸을 - 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이걸로 로봇 전투에 나가볼까 하는데, 엄마!"

맥이 탁 풀렸다.

"겨우 그거?"
"응?"
"이 엄마는, 네가 저걸 사기를 쳐서 팔아먹겠다고 하거나, 정크랫에게 팔았다거나, 만드는 도중에 도둑질이라도 해서 그 고백인줄 알았는데."
"엄마!"

송이 빽 소리를 지르자, 과장되게 귀를 가린 재닛은 손을 살래살래 흔들었다. 

"엄마 귀 아직 안먹었어. 아니, 딸 때문에 먹었으려나? 딸, 말 한번 해볼래?"

송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블라, 블라, 블라. 깔깔 웃으며 재닛은 송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뚱하게 부풀어있던 송도 금새 기분을 풀고 엄마의 품에 안겨들었다. 등을 천천히 쓸며 재닛은 안도했다. 아직 내 딸은 멀리가지 않겠구나.

"그런데, 왜 그런 데 나갈 생각을 했니? 송."
"그야, 엄마는 내가 위험한걸 싫어하잖아? 하지만 거기 나가서 우승하면 상금이 제법 짭짤하고, 또, 나는,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일단 만들긴 했지."
"미리 이야기했다면 엄마가 좀 도왔을지도 모르잖아?"
"엄마는 도시 나가서 일하기 바쁜데, 겨우 이런걸로 더 고생시키기 싫었어. 엄마도 알잖아? 나 정비랑 조립은 어른들 뺨치게 하는거. 혼자서 할 수 있었어."

어린 아이처럼 엄마의 품에 파고드는 송을, 재닛은 그저 꽉 안아줄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팟하고 쳐든 송의 만면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럼 엄마가 허락한걸로 알고 나 저거 들고 나간다?"
"그래, 딸이 만든걸로 효도 한번 받아보자."

재닛과 송은 마치 장난을 듬뿍 준비해놓은 어린아이처럼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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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꽃양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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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는거죠?"

나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에요."

나오의 손에는 평소의 지팡이가 아니라 바구니가 하나 들려있었다. 왕골로 짜여진 바구니에는 푹신하도록 쿠션이 하나 덧대져있었고, 거기엔 황갈색 털의 강아지 한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나오는 밀레시안, 아이나리에게 그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는 받아드는 것을 거부했다.

"말도 안돼. 못믿어요. 애당초 그럼 그걸 왜 나한테 주는데요?"
"하지만 당신이 아니면 어떻게 이, …걸 맡기겠어요?"

나오도 말을 조심스레 고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청년에게 건네야한다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는 듯 보였다. 막무가내로 쥐여주지는 않았지만 완고히 강아지를 건네려는 그녀를 지켜보던 그의 눈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잠깐 몇번 숨을 고르고는 눈을 번쩍 떴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 가느다란 눈매가 매서워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어째서 이걸 돌봐야되는데요!"

물론 몇분 후,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온 아이나리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자신의 말이 씨알도 들어먹히지 않는 것은 에전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만, 오늘 더 절절히 통감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이 강아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야할지 감춰야할지도 감이 오질 않는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강아지를 쳐다봤다. 속절없이 잘도 잔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티르 코네일. 바구니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말을 덥석 집어타고 온 동네를 활보할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걸어갔다. 그 모습이 생소한 던컨이 웃음을 지었다. 

"허허. 자네가 발로 걷는 건 처음 보는 기분인데. 제일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도 서러브레드를 타고 뛰어오지 않았나. 웬일인가? 엘프가 발이 빠르다는걸 간만에 자각이라도 한게야?"

아이나리는 웃음을 짓는 그에게 바구니를 쑥 내밀었다. 따뜻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뭘로 보여요?"
"강아지지 뭔가. 골든 리트리버로 보이는데."

그 순간, 바구니가 흔들리는 서슬에 깨어났는지 강아지가 잠에서 깼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쩌억. 분홍색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강아지. 눈동자는 선연한 붉은색. 푹신한 쿠션에 온몸을 파묻은채로 강아지가 고개만을 빼꼼히 들어올렸다.

"촌장님. 이게 루에리랍니다."
"뭐라고?"
"나오가 줬어요. 이게 루에리라고."

에린을 구했던 어쨌던 그도 고민이 없을 수는 없는 '인간'이라, 나름대로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던컨이었다. 사라진 세 용사들에 대해서 감추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촌장뿐이지 않은가. 잠도 깼겠다, 강아지의 목덜미를 대충 집어 들어올린 아이나리는 강아지를 자기 얼굴에 바짝 가져다댔다.

"그래서 이놈의 처분을 어떻게 해야될지 고민이라 들고와봤어요. 나오도 잘 키워달라고만 하고 말더라구요. 이, 못생긴, 악!"

강아지는 입을 벌려 아이나리의 코를 콱 물어버렸다. 깜짝 놀라 반쯤 강아지를 집어던진 것을 던컨이 겨우 받아들었다. 

"…."
"이 미친, 개…!"
"차, 참게!!"

제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던컨의 품에 안겨있던 강아지는 얼굴을 붙잡고 자신에게 손을 뻗는 아이나리의 손끝조차도 앙 물어버렸다. 복슬복슬하니 순하게 생겨먹은 주제에 어찌나 야무지게 물어뜯었는지 물린 끝에 잇자국이 선연하다. 화닥닥 잡아뺀 손에도 그렇다.

"아르르르르르…앙!앙!"

아까의 그 어리숙한 표정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제가 지을 수 있는 제일 험악한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고 제법 으르렁대는 강아지. 던컨은 당장이라도 강아지를 집어들어 패대기를 칠 기세의 아이나리의 손에서 강아지를 지키려고 던컨은 강아지를 품은 채로 어깨를 틀었다.

"내놔요!"
"아, 안되네! 거 진정 좀 하면 줍세! 이 놈이 왜이러는거야?"
"루에리 그 새끼 원래 나 싫어했잖아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환생해봐야 똑같겠지!"
"자…자넨 잘못한거 없잖은가!"
"지 동생 내가 죽인 걸로 평생 착각한 새끼를 내가 어떻게 좋아해요! 미움 받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오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나한테 이…이!!!!"

이를 바득바득 갈던 아이나리는 제 분노를 어디 풀질 못해 흙바닥에 발을 쾅쾅 굴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분노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나오는 '키워달라고'했다. 언제까지라는 기한도 없었다. 아이나리는, 정신이 아뜩해지는 기분이었다.

둘 사이의 트러블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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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그 커다란 입을 벌려 세상을 꿀꺽 삼켰다. 비가 내려 질척하게 젖은 흙바닥은 혓바닥일 것이다.
실제와 다른 것은 이 입 속은 몹시도 차갑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신의 얼굴에 떠오른 열망은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만개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눈이 거꾸로 박힌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경외는 없을지언정 우리들이 신을 받들 때나 바칠 뜨거운 그것. 모든 이에게 떠받들어져도 모자란 당신. 그럼에도 제일 밑에서 온갖 허물과 오물을 뒤집어쓰고서 우리를 지키는 당신. 

그런 당신이 자신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은 그야말로 주신과 마주섰을 때보다 향기로웠다. 아, 그 정복감.

뺨을 붉히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손을 가볍게 쥐어 인사하는 그의, 속눈썹의 흔들리던 방향까지 말하라면 할 수 있을 정도로 톨비쉬는 그 때의 기억이 또렷했다. 그런 그가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이 사람의 애정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독점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저 스스로 자각하기 전에 이미 뱃속을 그득히 메우고 피어오른 욕심을, 차라리 욕구라고 불러도 좋을 그것을 톨비쉬는 너무도 쉬이 받아들였다. 종교, 신, 그것을 향안 맹목적인 광신은 이미 기사단 모두에게 얽어있는 문신과도 같은 것이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갈구하는, 신의 애정을 갈구하는 이들이 기사단이었다. 대상이 바뀌었다 해서 달라지지는 않는다. 톨비쉬가 모시는 신과 리즈엘린이 다른 것은 하나였다.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실체 없는 것을 받드는 그에게 실체 있는 '애정'은 너무도 다루기 쉬웠다. 그것이 자신을 받드는 것이라면 더더욱이.


나만은 당신 곁에 영원히.

어느 때는 그가 지키지 못한 붉은 머리의 소녀를, 어느 때는 그를 짓밟고 침을 뱉던 모든 이들을. 수많은 칼을 들고, 마치 세상 모든 이들이 그를 모멸한다는 듯 말로 하나씩, 하나씩, 확실하게 찌른다. 겸사겸사 세상을 구하는 것엔 익숙하시지 않습니까.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어 무너질 때가 되면 그의 곁에 다가가 안아들고 말한다. 자신의 품, 차가운 금속의 갑옷 너머에서도 느낄 수 있는 뜨겁게 달아오른 당신의 손. 당신의 얼굴. 쏟아지는 눈물을 양손 한가득 받아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꾹꾹 눌러담아 참고 톨비쉬는 긴 긴 시간동안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강인한 얼굴이 내 앞에서만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이 좋았다. 

그런 그가 어느날부터인가 자신의 것과 똑같은 갑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의 감정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톨비쉬는 알지 못했다. 그저 섬뜩했다. 한폭의 성화(聖畵)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것에 자신이 비친 것이 달랐다. 자신을 사랑하다못해 자신으로 물드는 모양은 이상하게도 불쾌했다.
그 때부터 톨비쉬는 리즈엘린을 정신적으로 짓밟았다. 끊임없이 거리를 재고 미끼를 던진다. 자신이 고개를 치켜올리고 흐트러놓는 부스러기같은 애정에도 그는 감사했다. 조사라는 명목으로 그의 삶을 낱낱이 쪼개어 기억하는 자신이었기에 더없이 악랄할 수 있었다. 

그럼요, 나만은 당신 곁에 영원히.
그래요. 당신은 나만의 곁에 영원히.

끊임없이 그의 등에, 가슴에, 입술에, 눈물에, 그의 몸과 마음 그 어느 곳 한군데도 빼놓지 않고 빼곡히 자신을 새겨넣는 톨비쉬는 몰랐다. 자신이 그를 곁에 잡아매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과 말들이 자신도 엮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몰랐다.

그 날. 아무도 없는 그 아발론 게이트에서.

"톨비쉬도 날 사랑하나요."

아발론 게이트는 그 날 따라 유난히 어두운 것처럼 보였다. 침묵보다 더한 빗소리가 온 세상을 두들기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도 않고 흠뻑 젖어버린 채로, 언제나처럼 문드러진 마음을 양손에 꼭 그러쥐고 그는 처음으로 사랑을 입에 담았다. 그것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톨비쉬의 잘못이었다. 

"아니오."

그것을 밀어냈다. 부정했다. 거짓말했다. 그는 리즈엘린, 누구보다도 자신의 사랑을 갈구했던 한 반쪽자리 신의 마음을 내리쳐 제 발로 짓밟았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잘 알면서도 그랬다. 이 사람은 그래도 날 사랑할 것이라는 확신은 누가 쥐여준 것이었던가. 제 멋대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던가.

그래요.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 짧은 대답을 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눈빛이 죽었다. 아차한 그 순간 리즈엘린, 그가 자신의 목을 노려왔다. 자신과 재질 하나 틀릴 리가 없는 갑옷을 입고도 보이는 그 기민한 움직임. 양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아도 자신의 목을 부러뜨리는 것은 하품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톨비쉬는 답지않게 발을 헛디뎠다. 자신을 향한 애정과 증오가 이제는 리즈엘린의 눈 안에서 활활 피어올라 그 스스로를 태우고 있었다. 

널부러진 톨비쉬는 쏟아지는 빗방울이 성가셨다. 얼마나 매섭게 오는지 입고있는 갑옷을 퉁퉁 울릴 지경이다. 손을 움직여 얼굴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걷고싶었다. 이 진창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하고 싶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이 때문에 몸이 자유롭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빗물에 흠뻑 젖은 남자는, 어스듯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톨비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총기를 잃은 흐릿한 눈이 처참하다. 

"리즈엘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서슬퍼런 안광이 몸을 꿰뚫는 것 같다. 방금의 그 눈빛은 환상이었던가. 순식간에 노기로 뒤덮힌 눈동자는,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있음에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건방지게 이름으로 부르지 마."
"그럼 조장이라고 부를까요?"
"톨비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달콤한 노성이 자신의 심장을 쑤시는 비수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톨비쉬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비아냥과 독설 가득한 말투를 들어 톨비쉬는 리즈엘린을 찔렀다.

"불쌍한 인간."

그 말을 뱉고 나서야, 그제야 모로 돌리고있던 고개를 비틀어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표독한 표정을 지어낸다. 얼굴에 덮어쓴 가면으로 바라본 당신과, 아까부터 상상하고 있던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한 순간, 온몸을 헤집는 소름. 톨비쉬는 몸을 떨었다. 당신은 그런 눈을 하고 있을테다. 그래. 당신은 그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붉은빛 도는 눈은 분노로 물드는 순간 더 아름다웠었다. 

"…사실 이딴 껍데기보다 당신이 갖고싶었어."

목덜미의 갑옷을 쥐어뜯으며 말하는 그. 비참하게 고개를, 온몸을 떨어뜨려 자신의 위로 무너지는 그. 그러고선 온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당신. 두 팔을 들어올려 안아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 무너뜨려 망가진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리즈엘린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무릎으로 자신의 양 손목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톨비쉬는 웃었다. 비릿한 웃음이 입가로 새어나왔다. 흡사 뱀같은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자신과 그를 옭아맨다.

자신 앞에서만 무너지는 당신은, 그 표정만큼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톨비쉬는 그 사실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리즈. 사랑합니다.

톨비쉬는 그 한마디만큼은 영원히 입 밖으로 뱉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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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알터의 순결은 도둑맞았다. 물론 육체적인 것을 이름이다. 그 전모를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무리 기사단이 촉각을 세우고 있다한들 나타나지 않는 적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신의 이름을 받은 밀레시안, 진짜 성은 어떨지 모르지만 대중적인 김씨는 어떨까. 오늘의 그의 이름은 뭐, 얼추 김아타쯤으로 지어붙이기로 하자. 하여간 그는 지루한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그런 이인 만큼 평지풍파를 왕왕 몰고오는 일도 있었다. 오늘이 그 평지풍파일줄 몰랐을 뿐이다.

홀로 정찰을 다녀온 알터가 마주친 것은 질펀하게 벌어진 술판이었다. 와인, 브랜디, 럼, 종류를 막론하고 갖가지 술병이 온통 아발론 게이트를 굴러다니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술판이 벌어진 곳이 숙소 옆인데도 이제 막 입구에 들어선 자신의 발치에 채일 정도니까 말은 이미 다 했다. 술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을 견습기사들은 이미 침대에 물먹은 솜이불처럼 푹푹 늘어져있고, 그 술 독하게 먹기로 소문난 톨비쉬 조장조차 숨냄새조차 술냄새가 날 것 같은 얼굴로 거나하게 취해있다. 아벨린도 흔치않게 과음한 꼴이다. 제정신을 차리고싶은 것인지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내젓고 있지만 그것이 소용이 있을런지. 카즈윈 조장? 저기 테이블에 쓰러져 잠자기 바빠보인다. 어디에 숨어있나 눈으로 한참 좇았던 피네 조장은 알고봤더니 견습 기사들 사이에서 팔다리를 마구 내뻗은 채로 퍼져 자고있다.

이 혼돈 속에서 그나마 제일 쌩쌩한건 역시,

"아아알터!"

지금 저, 찰랑찰랑 술병을 흔들며 자신을 반기는 밀레시안 조장 뿐이다.

"조장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츄우서기라고 말해짜나 알터어~."

헤죽헤죽 웃으며 팔에 감기는 그를 부축하며, 알터는 며칠 전의 조장의 말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분명히, 자신이 원래 있던 곳에서 '추석'이라는 '명절'이 있다고 했었다. 가족들끼리 모여 맛있는 걸 해먹고, 친교를 다지는 따뜻한 친목의 장이라고 그랬었지. 그런 말을 하며 김아타, 그는, 몹시도 쓸쓸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밀레시안 말고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할 상대가 없었던 자신으로서는 잊어주지 않는 너희들이 가족과도 같다며, 꼭 명절을 같이 보내고 싶다던 그 말. 유난히도 그 진정성 어린 호소에 안경이 미끄러져 흘러내릴 정도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승인을 내린 슈안 덕에 모두가 명절을 지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술판이라고는 설명 안했잖아요!"
"오모, 오또케, 츄서게, 술이 빠져?"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입을 가리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는 그. 그것을 보고 통감했다. 아, 속았구나. 이 사람 좋아하는 조장이 술을 빼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패착이었던 모양이다. 알터의 입맛이 씁쓸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타는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알터의 손을 이끌고 술판으로 끌고 가 앉혔다. 아타가 거의 강제로 손에 쥐여준 가느다란 잔에 찰랑찰랑 갈색빛의 술이 차오른다.

"마셔, 마셔."
"조장, 저 이거 마시면 안되는데요! 아벨린 조장! 살려줘요!"
"시이끄러어 알터!"
"그래, 시끄럽다잖아!"

술 때문에 머리가 쨍쨍 울리는 모양이었다. 혀가 꼬이다 못해 돌돌 말린 꼴의 아벨린은 상쾌하게 알터의 구조요청을 쳐냈다. 또 그걸 냉큼 받아먹은 아타가 짐짓 화내는 표정을 지으며, 하지만 입매에 한껏 걸린 웃음을 감추진 못하고 시시덕거린다. 느즈막히 합류할 바엔 아예 오지 말걸 싶다. 아마 자기도 저기 침대에 널린 꼴이 될 모양이라고 알터는 각오했다. 손에 쥐여진 술을 언제 납죽 입으로 부어야하나 한창 고민하던 알터를 어째선지 아타가 빤히 들여다본다.

"알았어요, 빨리 마실테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한숨을 쉬며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알터의 손목을 콱 잡아챈 아타는, 당황해 흔들리는 알터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몹시 불길했다.

"아알터."
"네?"
"우리 말야아."
"네."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그 뒤로는 알터의 손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쪼옥 소리나도록 알터의 입에 밀레시안이, 뽀뽀해버렸다. 모든 기사단들이 보는 앞에서. 물론 뽀뽀 자체는 정말 빨리 끝났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무래 성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지만 지금 조장은 남자인데! 얼어붙은 알터는 젖혀두고 아타는 웃기 바쁘다.

"조장!!!!!"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비명과 같은 부름에 고개를 돌린 곳은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개진 카나였다. 제 몸에 반쯤 엉겨져있던 이불을 찢을 듯이 콱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카나는 외쳤다.

"치사해요!!!!!!!! 나도 뽀뽀해줘!!!!!!!!!!!!!"
"카나, 오빠한테 앵겨!!!!!!!!!!!"

저쪽에서부터 달려오는 카나, 그걸 또 받아주는 아타의 뒤통수. 안경을 어스듯하게 추켜올리며 기사단 예산이 부족하다고 앉은 채로 로간을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슈안. 이제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듯 아벨린은 테이블에 엎어져있는 카즈윈에게 주절주절 기사단의 교리를 주워섬기며 태도를 지적하고 있었다. 아니, 저런다고 내일 기억이나 하려나? 이 모든, 혼돈의 상태를 뜬 눈으로 지켜보며 알터는 눈 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술 한방울도 안먹고도 술 취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오늘은 횡재한 모양이다. 아까 조장이 부어준 술이 눈 앞에 찰랑찰랑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다. 여기서 맨정신으로 더 버티다간 자기가 제 명에 못버틸 것 같았다. 망설임 한점 없이 알터는 술을 그대로 목구멍에 부어넣었다. 도수가 얼마나 높은지 목구멍이 화끈하게 지져지는 기분이다. 

여기는 아발론 게이트. 
몹시도 신성한, 그리고 앞으로도 신성할 신을 받들어 모시는 비밀스러운 장소.
물론 오늘은 자의든 아니든 술꾼들이 점령했지만, 오늘 하루만 방만하게 두도록 하자.

입술의 순결을 너무도 가볍게 강탈당한 알터에게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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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고난 뒤에는, 현관 걸음걸음마다 허물처럼 옷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낮은 굽의 펌프스, 재킷, 치마, 스타킹의 순서. 온몸을 갑갑하게 죄고 있던 것들을 전부 다 내던지고 치우지도 못하고 나간 침대로 무너진다. 그러고나선 묶음으로 사둔 머리끈을 아무거나 집어들고 어중간한 어깨 길이의 머리카락을 엉킨 모양 그대로 틀어올린다. 몸을 일으켜 셔츠와 속옷까지 바닥으로 내던지고 욕실에 들어가는 것까지 완성해야 그녀는 집으로 완전히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녀의 꽤 오랜 습관이었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물을 온몸에 맞으며 그녀는  폼클렌저로 양손 가득 거품을 냈다. 그리고 그 손을 얼굴로 가져가 문지른다. 얼굴에 두드린 화장도 얼른 벗어내고 싶은 욕심에 힘차게 얼굴을 문지르고, 씻어낸다. 뿌듯한 기분으로 거울을 들여다본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의 열기에 뿌옇게 번진 거울을 손으로 닦아낸 뒤에 그녀는 자신의 불쾌함이 무엇인지 알았다.
 
자신의 눈썹이, 눈썹이 있어야 했을 부분이 그야말로 털 한오라기도 없이 깨끗하게 씻겨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방도가 없었다.곱씹는 것을 금새 그만둔 여자는 내일부터는 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는 것이 더 급했다. 사실 눈썹 따위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아닌가. 외려 있는 동안에도 모양이 맘에 들지 않아 깎기도 하고, 아예 그려버리기도 하고, 문신을 해버리는 사람도 태반이다. 아예 앞머리를 내려 덮어버리는 방도도 있다. 모양을 다듬고 깎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아예 눈썹이 없으니 내 맘대로 그려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낸 그녀는 평시 그리던대로 그리면 되겠거니 하고 펜슬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금새 후회했다.
있는 것을 잘라내고 메우는 것과 새로이 그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위에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아무리 반복해도 오늘 아침까지 내가 그리던 눈썹과는 완전히 다른 성 싶었다. 거울 속의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혼자서 찍어댄 사진을  살펴보기도 하고, 남이 찍어준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눈 위의 뼈를 더듬어가며, 마치 오늘 화장을 처음 해보는 양 삐뚤삐뚤 선을 그어본다. 눈썹이 있어야했을 부분이 너무 문지른 탓에 빨갛게 부어버린 뒤에야 그녀는 펜슬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어찌되었던 그녀는 내일 출근을 위해 잠을 자야했다.
 
다음날 그녀는 엉성하게 그린 눈썹을 몹시도 신경쓰며 출근했다. 너무 진하게 그리진 않았는지, 눈썹이 없는 것이 티가 나지는 않는건지, 양쪽이 비뚤어지지는 않았는지. 너무 많은 것이 신경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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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웃고 있는 그 표정 너머에
부자연 스러운 웃는 가면을 쓰고 과장스레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듯이 손을 내미는 인영.

#2 진심까지 꿰뚫어 볼 순 없어요
탐탁치않은 표정으로 그 손을 잡을까말까 고민하다가
 
#3그저 따라서 웃으면 그만
곧 표정을 고치고 방긋이 웃으며 그 손을 잡는 ()
 
화면에 가득하게 웃는 가면이 손을 내밀고 있는 모양이 있고,
눈을 깜 빡 하면 화면이 전환.
 
#4누군가 힌트를 적어 놨어도
손 끝에 집어들고있는 작은 직소퍼즐 조각 하나. 뭔가 글씨가 쓰여있다. 보이진 않는다. 
#5너무 작아서 읽을 수가 없어요
그걸 지그시 들여다보던, 바닥에 앉아있는 (), 퍼즐에서 눈을 떼고 바닥에 내려놓는다.
 
#6. 차근차근히 푸는 수밖에
얼기설기 조립(?)된 맨바닥의 퍼즐조각들과, ()의 옆에 동그마니 쌓여있는 직소퍼즐 조각들.
 
#7 그렇다 해도 안경을 쓰지는 않으려고요
그저 바닥에 앉아서 천천히 이리저리 조각들을 살펴보는 ()

#8하루 온종일 눈을 뜨면 당장 보이는 것만 보고 살기도 바쁜데 
직소퍼즐 조각더미가 조금씩 늘어난다.

#9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짜증나는 표정으로 직소퍼즐을 하나씩 내려놓는 (), 어느새 등 뒤를 그득히 메운 직소퍼즐더미

#10 까만 속마음까지 보고 싶지 않아
새카만 직소퍼즐 한조각을 저 멀리로 집어던져버린다.

#11 나는 안 그래도 충분히 피곤해
직소퍼즐 더미 위에 누워버리는 ()

#12 더 작은 글씨까지 읽고 싶지 않아
카메라가 3인칭 풀샷으로 빠지고, 지금까지 ()가 조립하던 직소퍼즐 조각의 외곽선이 커다란 직소퍼즐 모양이다.
 
그대로 페이드아웃.

#13 공들여 감춰놓은 약점을
아까의 새카만 인영, 아까와 달리 한 손이 등 뒤로 돌아가있다. 여전히 친절한 가면으로 손을 내민다.

#14 짓궂게 찾아내고 싶진 않아요
표정변화 없이 그 손을 쳐다보는 ()
 
#15 그저 적당히 속으면 그만
아까와 달리 무뚝뚝한, 짜증도 묻어나는 듯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잡는다.
 
무지개가 휙 가로질러서 화면전환
 
#16 무지개 뒤편엔 뭐가 있는지
무지개 끝의 커다란 항아리의 나무뚜껑을 열어보는 ()
#17 너무 멀어서 보이지가 않아요
아무것도 없다.
 
#18 대단한 걸 상상할 수밖에
항아리 안쪽에서 밖을 들여다보는 구도, 뚜껑을 휙 덮어버리는 ().
 
#19 그렇다 해도 안경을 쓰지는 않으려고요
웅크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있는 ()

#20 속고 속이고 그러다 또 믿고
웃는 가면을 쓴 새카만 인영이 다가와 천천히 손을 내민다.

#21 상상을 하고 실망하기도 바쁜데
그 손바닥 한중간에 삐죽히 나있는 커다란 가시.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
 
#22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새카만 인영이 ()의 귓가에 다가와 무슨 말을 속삭이려 한다.
 
#23누구의 흠까지 궁금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귀를 막는 ()
 
#24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의 옆에 서서 멀찍히 있는 무엇인가를 손가락질하는 새카만 인영

#25 좀 더 멀리까지 보고 싶지 않아
양손으로 눈을 가려버리는 ()
 
#26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 주위를 웅성웅성 떠도는 검은 인영들이 휘청휘청 맴돈다.

#27 무거운 안경까지 쓰지 않을 거야
옆으로 스르륵 쓰러지는 (). 손발목에 무거운 족쇄가 채워져있다.
 
#28 나는 안 그래도 충분히 피곤해
바닥에 누워 눈을 반쯤 뜨고 있다가

#29 더 각진 안경까지 쓰지 않을 거야
눈을 감아버리는 ()
 

페이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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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시안들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하는 이야기 중에는 그런 말이 있다.


모든 밀레시안은 누군가의 영웅이다.


몹시도 거만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이었다. 비난받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밀레시안들은 웃었다.여신의 가호 아래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그들은 어째서인지 그저 사람이 좋을줄만 알았다. ㅣ태생부터 사람을 미워할줄 모르게 태어난 듯이 모두의 앞에 서서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무나 도와달라는 외침이 나를 향한 부탁이 되고, 그 부탁들이 쌓여 의무가 된다. 많은 사람들의 부탁이 모여 자신들을 짓누르고 비난해도 그네들은 선량할줄만 아는 이들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상냥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대개의 밀레시안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일 것이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것에 어떻게 대답을 붙일지, 어떻게 해야 좀 더 잘 대답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족속이 밀레시안이다. 개개의 차는 있지만 그들은 자기들 말마따나 누군가의 영웅이 되기 위해 태어난 듯 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야기할 밀레시안 소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스스로 영웅이기를 거부한 한 소녀의 이야기.




검은머리의 여자의 손목은 가느다란 사슬로 결박되어 있었다. 천장 좁은 틈 어딘가에서 새어비치는 듯 그녀의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환한 빛과 별개로 그 등에 달린 검은 날개는 저 혼자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들리나요?…'

"누구세요?"


푸른머리의 엘프소녀는 반문했다.


'아 … 제 말이 들리고 있군요…….'


검은 날개를 단 여자는 소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힘든 부탁이지만….이쪽 세상으로 와주세요. 티르 나 노이가…파괴되려 합니다….'


소녀는 그 광경에서 등을 돌렸다.




"…아, 또 그 때 꿈."


아첼리스는 부신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적당히 하룻밤 보내기엔 괜찮지만, 아무래도 텐트라는건 천이 얇다보니 조금만 해가 떠도 안의 온도가 급변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사막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사막에서 자란 엘프라고 해도 좀 더 더워지기 전에 움직이고 쉬는게 상책이다. 침낭 밖으로 기어나온 그녀는 재빨리 텐트를 걷어서 챙긴 뒤, 빠른 걸음으로 사막의 모래를 푹푹 밟고 넘어갔다.




아첼리스, 밀레시안. 사실 보기엔 다른 밀레시안과 다를 바 없는 소녀는 몹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제 손으로 여신을 구하기를 거절한 것이 그것이다. 그녀가 여신에게 '구해달라'는 계시를 받은 날, 계시를 받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모든 계시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오롯이 그녀 혼자만이 세계를 구하기를 거부했다.이유는 단순했다.


"이번엔 사막횡단을 해보려고."

"첼, 너 진짜 특이한건 알지?"


이번 여행을 가기 전 그녀의 친구인 밀레시안은 진심으로 신기한 것을 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종족이 달라도 밀레시안들은 대개 울라에 상주했다. 이리아를 헤집고다니는 별종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사람들도 목적은 보통 뚜렷하다. 필요한 유물이 있다거나, 다난들의 심부름을 해준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녀, 아첼리스는 그저 호기심으로만 이리아 종주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번에 다 성공하긴 어려우니 구간을 나누어서 하고는 있지만  말을 타고 하는것도 아닌, 오롯이 제 두발로만 걷는다.


"난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는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게 좋다니까, 그러니까."

"네,네. 알아. 영웅이 되기 싫다고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했잖아. 니 입으로."

"내 포지션은 딱, 영웅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거야."

"그리고 니 맘에 드는 영웅은 아직 안계시고."

"그러니까 자연물로 노래해주는 수밖에 없지?"

"그으래애. 니 맘대루 하셔라. 이번엔 어디서 어디까지야?"

"발레스부터 필리아."

"어휴. 난 나이 먹어도 이렇게 안미쳐야지."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근한 비난조가 섞여있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은 아님을 안다. 뭐, 그런 것이다. 스스로도 별종인 것은 알지만 정말로 간섭하지는 않는 친구에게 아첼은 그저 고마움만 느꼈다.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 털고는 친구와 또 잔을 들었다.  이번 여장은 제법 길 예정이니까 저 퉁명스러움도 듣기 싫을만큼 들어둬야지.





그러니까 여기서 이게 나오면 안되는데, 아이구. 이걸 정말 어쩌나.

아첼리스는 그저 헛헛하게 커다란 뼈의 무덤을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덤이라고 부르기엔 이 뼈는 너무 크고 강인했다.

용뼈 무덤. 무유 사막 한중간에 자리를 틀고 앉은 거대한 뼈는 용의 것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자리에 죽어 뼈를 남겼는지 그 이유는, 용이 죽었다 깨어 이야기해주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 차치하고, 콘누스를 횡단하고 있어야 할 자신이 어쩌다 이곳으로 왔는지 아첼리스 스스로도 모르는 지경이니 더이상 이야기가 필요하지도 않다.  헤유. 깊은 한숨을 쉬고 그녀는 용 뼈에 다가갔다. 뜨거운 사막의 햇살을 받고, 스콜에 두들겨 맞아도 부서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굳건히 서있을 것 같은 이 용의 잔해는 여남은 작은 그늘이라도 드리워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이번엔 완전히 망했는데…… 기념품으로 뭘 가져가야 되냐 정말…."


모래라도 파갈까. 용 뼈가 섞였다고. …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망연히 웃음을 지었다.


"…아이구. 이걸 정말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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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꽃양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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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도, 또다시, 바닥에, 언제나.

그리고 나는 눈을 감는다. 사방에 번져오는 어둠에 먹히는 것은 불쾌하니까, 아예 나 스스로를 어둠에 가두는 것이다. 이번의 당신은 조금 덜 아팠기만을 바래요. 정말로 그래요.


레이모어. 내가 당신의 어디까지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할까요?

당신은 나의 어디까지 알고있나요?

네? 대답해줘요, 당신.


"전투에 나가시는 것 치고는 무척 꾸미셨네요."


목소리에는 의외가 번져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면, 언제까지나 상냥한, 그저 상냥하기만 할 것 같은 미소가 물빛 머리카락 아래에서 흔들린다. 당신은 약간 부스스해보이는 머리칼을 하고 있다. 단정하지만 특색없는 옷차림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지 못했다. 그가 팔에 실린더를 차고있지 않았다면 힐러라고 해도 믿을만큼 선량한 얼굴이 죽음 앞에서 구겨지는 것을 나는 몇번이나 목도했다.


"옷이라도 예쁘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아서요."

"조심하세요. 치맛자락이라도 밟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퉁명스레 대답하는 내게 당신은 농을 던진다. 뭐, 까짓것 제가 지켜드려도 되지만요. 그 말을 하고 씨익 미소를 짓는 당신에게 마주대고 웃어줄 힘도 남아있지 않다. 내가 하는 말들은 전부 다 거짓말뿐이다. 이 전투의 끝에 힘이 모자랐던 내가, 갑옷의 무게에 겨워 내 몸 하나 지탱치 못할 때 당신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으냐고 묻던 당신의 떨리던 목소리와 뜨거운 피. 그러니까 갑옷은 안된다.  내 트인 목덜미에 쏟아져 흘러내리던 뜨겁고 역한 그 냄새들. 공격당하는 당신을 가로막아도, 모든 적을 먼저 죽이겠다고 날뛰어봐도 내 갑옷은 그저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러니까 안된다.


"하지만 검은 드레스라니 특이하네요. 물론 예쁘십니다만."


거짓말 말아요. 당신, 거짓말할 때 웃는거 어색한거 잘 모르죠? 게다가 저번엔 상복같아서 불길하다고 했었어. 하긴 그래서 다른 색을 섞은 드레스를 새로 하나 맞췄지만. 검은 드레스와 붉은 리본과 황금색 레이스. 그 모든 것은 당신을 위해. 내 머리에 단 붉은색 장미는 이전까지의 당신을 애도하려고 준비한거에요. 그 말은 꿀꺽 삼켜 없앤다. 감정을 삼킨 대신 치밀어오는 것은 분노와 원망과, 그런 것들이다. 빌어먹을 모리안. 빌어먹을 신들. 어째서. 내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 레이모어, 당신의 얼굴이 걱정스레 바뀐다.


"어디 좋지 않은건가요?"

"가요."


대답하지 않아요. 당신을 지키지 못한 나는 몇번이나 이 장소에 돌아와있는걸요. 그것으로 최악인데.


제너. 운좋은줄 알아요. 이 반복이 아니었다면 난 당신한테서 이 남자 뺏었을지도 몰라. 당신밖에 모르니까, 당신을 위해서 사니까, 수십번을 나 대신 죽어버린 이 사람이 당신밖에 모른다고 말했으니까 양보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죽지말고, 이 멍청한 남자를 내가 당신 앞에 데려다놓을 때까지 버티란 말이야.


손에 쥔 완드를 단단히 틀어쥐고 그림자 세계로. 내 약함을 탓하며 나는 이제 당신을 구하는건지 세계를 구하는건지도 모르는 채다. 하지만 레이모어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세계 하나쯤은 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나만이 되돌아오는 이 세계를 당신을 위해 깨뜨려볼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번엔, 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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