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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눈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동그랗게 오려내는 노란 백열등의 불빛에 쓰라림을 느꼈다. 눈을 끔뻑대며 멍한 머리를 정리해보려 애를 썼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그만두고는 주위를 살폈다.
이상스러운 방이었다. 일부러 늘어뜨려놓은 듯 보이는 전선은 고깔을 쓴 백열전구를 매달고서 책상만을 비추고 있었다. 방에 광원이라고는 그 백열전구가 전부였지만, 너무 낮게 배치가 되어 있어 있으나 마나였다. 낡아빠진 책상과 의자 2개, 어둡게 비추는 노란 조명이 모든 가재도구였다. 흡사 취조실 같은 분위기의 방은 침침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낡아빠진, 나무 거스러미가 잔뜩 돋은 의자에 걸쳐진 채로 정신을 까마득하게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겨보려 했지만 휘청 흔들리는 통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 곳에 오기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그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주한 문에서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한 삐걱거림을 동반하고 문이 열렸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보구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의 목소리는 걸죽했다. 잘 닫히지 않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는 그는 스스럼없이 내 맞은편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문이 닫히는 그 서슬에 백열전구는 삐걱대며 흔들렸다. 너무 낮은 위치 때문에 방을 밝히는 기능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백열전구의 환한 빛에 그의 아래턱이 드러났다. 그는 웃었고, 덕분에 니코틴에 찌든 노란 이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몸을 끄덕끄덕 움직여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몸이 아픈 곳은 없었고, 여차하면 치고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남자는 지그시 나를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얼굴에는 어느 순간 웃음기가 지워져 있었다.
“덥군요. 조명이 너무 가까워요.”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남자는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자못 유쾌해서, 웃음을 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시원스런 웃음소리였다. 그 풀에 매달린 전등이 혼란스레 흔들린다. 좌, 우, 좌, 우, 대뜸 웃음을 터뜨린 것처럼 그는 뚝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고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당겼다.
“여보쇼, 당황하지도 않는구만. 신기한데. 안 놀랐소?”
말투는 여전히 거칠고 목소리는 걸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드러난 얼굴로는 그는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었다. 그가 놀라지 않는 내게 놀란 만큼이나 나는 그가 젊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심 그 목소리에 어울리는 얼굴은, 면도날 자국은 한두 개쯤 나있는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또 가만히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귀가 따갑도록 조명은 앞, 뒤, 앞, 뒤로 흔들린다. 그 소리가 신경을 긁어 참기가 힘들었다. 입을 열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째서인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적당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그는 내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상체를 뒤로 뺐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능숙한 손길로 담배를 물어서 불을 붙였다. 곧 희뿌연 연기가 방을 가로질렀다.
“피겠소?”
그가 담배를 내밀어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책상 위에 담배와 라이터를 툭 던진 그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기는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숨이 막혔다. 뭐 이 정도로 그러냐는, 비웃음이 담긴듯한 눈으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내 집.”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째서? 라고 묻기 전에 그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뱉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 체포 당한거요.”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는 그 신경이 놀라울 따름이다. 온갖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간다. 내가 잘못한건 없는 것 같다는 자체 검열들밖에 지나가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끌어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다. 당황하는 내 앞에서 연이어 담배에 불을 댕기며 그는 한숨같이 말을 뱉었다.
“나도 당신이 왜 잡혀왔는지 모릅니다.”
“앞뒤 없이 사람을 가둬놓는 건 어느나라 법입니까.”
“내가 윗대가리들 속을 어떻게 알겠소.”
번득 고래를 쳐들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있었다. 그는 담배의 필터를 질겅질겅 신경실적으로 씹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다 피워낸 담배를 거칠게 책상에 문질러 꺼버리고는 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방 안은 이제 뿌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팠다.
“나는 형사요. 내가 위에서 들은 말이라고는 당신을 내 집 지하실에 잡아놓고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 뿐이었지. 아마 정식으로 구치장에 처넣을 수는 없었으니 이런 궁여지책을 마련했을 거요.”
나는 두 손을 그러쥐고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무슨 일을 통해 내가 여기 잡혀왔는지 기억을 해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경위는 저 멀리 어딘가에 숨어버리는 기분이었고, 그냥 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하여튼 난 당신을 여기서 내보낼 수 는 없소. 나도 위쪽 사람들한테 모가지 당하기는 싫고 이렇게 잡혀왔다는 건 당신이 뭔가 잘못하긴 했단 거겠지. 그래도, 잘 모르는 사람한테 험하게 대하긴 싫으니 혐의가 풀릴 때까지는 여기 있어 주셔야겠소.”
그는 내가 더 이상 질문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내게 불안감만 한가득 안겨준 채로 나가고 말았다. 문밖에서 철컥거리며 잠그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냥 망연히 앉아있을 뿐이다.
다음날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 나는 결국 같은 불만을 토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너무 갑갑합니다. 덥구요. 조명이 너무 가깝지 않습니까. 게다가, 밤에 불을 끌 수가 없어요. 스위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밤새 한숨도 못잤습니다.”
식사를 챙겨 내려온 형사는 어제와는 다른 내 태도에 좀 놀란 듯도 했지만 그래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조명을 보더니 미안한 듯이 웃었다.
“아아. 여긴 내가 창고로 쓰던 곳이라 조명은 달려있긴 합니다만. 불을 끄기엔 좀 그렇수다.”
어제보다 조금 더 예의바른 말투인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쓰기엔 잠이 부족해서 신경질이 너무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새삼스레 방을 휘 둘러보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도 없거든. 차라리 내가 담요를 하나 더 가져다 드릴테니 밤에 그걸로 조명을 덮으쇼. 내가 늦게라도 오면 시커먼 안에서 갇혀있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게 더 나을 겁니다.”
시종일관 신경질 한번 내지 않는 그에게 신경질 낼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에게 간신히 한마디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애 투정보다 못할 것 같은 말이었다.
“저기 있는 전구가 날 감시하는 것 같단 말입니다.”
부루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그는 예의 그 터지는 듯한 웃음소리로 껄껄 웃어젖히며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있냐며 일축해버렸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음식이 들려있었다. 편의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락이었다. 그제야 식욕이 들어 나는 우걱우걱 음식을 입에 밀어넣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식사 후, 그는 바깥에서 있었던, 했었던 일들이나 그런 것들을 꼬치꼬치 캐물어왔고 나는 거기에 대답했다. 그 질문들은 내가 기억하지 못할만큼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느라 진땀을 뺐지만, 결국 끝은 “난 잘못한 게 없다”였다. 왠지, 내가 그렇게 대답할 때의 그는 한껏 비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얼굴은 내가 잘못 본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알았다고 하곤 식기를 들고 나갔다.
그가 나간 뒤 나는 어깨 위에 모포를 두르고 책상에 엎드렸다. 새로 받은, 한 장의 남은 모포로 에둘러 싸버려 광원 하나 없이, 어둠이 짙게 깔린 방에서 나는 완전히 잠에 잠겨버렸다.
술 냄새 섞인 숨이 목덜미를 타고 미끄러진다. 분홍색의 립스틱이 붉은색 조명 아래에서 반질거렸다. 그녀는 유난히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새실새실 웃으며 내게 입을 맞춰왔다.
일어났어?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눈앞에 떠있다. 내가 마음에 든다며 엉겨 붙은 그녀를 안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늘 색스러운 화장을 하고 내 옆에 달라붙어 신음소리를 귓가에 불어넣곤 하던 그녀. 하지만 난 그녀에 대한 어떠한 감정도 느끼질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그렇게 날 안아달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 마땅했다. 그럼 그녀는 부루퉁한 얼굴로, 다른 손님에게 불려가 그를 상대하겠지. 내 근처에 앉아 내게 시선을 힐끔힐끔 던지지만 나는 그녀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그게 지금까지 당연한 듯이 했던 행동들이었다.
어젯밤 일이 기억났다. 별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난 살짝 취한 상태였고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붙어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룸에 이끌려 들어간 뒤, 그녀는 내 허벅지에 올라타곤 살짝 풀린 눈으로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몸으로 덤벼들던 그녀가, 그 순간만큼은 순진한 소녀 같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순한 디자인의 귀걸이도 입술에 가볍게 붙어있는 듯한 분홍색의 립스틱도 왜 그렇게 도드라져보였을까. 그래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곳으로 왔었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잔뜩 취해서.
‥꿈 꿨어.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내 몸을 더듬으며 다시 나에게 엉겨왔다. 향수 냄새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난 흐릿한 초점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고 비명을 질렀다. 서치 라이트가 내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검은색 줄무늬가 죽죽 그어진 흰 옷을 아래위로 입고 있었고 서치 라이트를 등진채로 간수는 쫓아오고 있었다. 그 역광이 시커먼 그림자를 내게 드리우고 다가오자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싫었다. 싫었다. 도망가야 했다.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소리를 지른 끝에 진정이 된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눈앞에 불이 번쩍 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괜찮소?”
“아뇨.”
입 안이 욱신거린다. 골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형사가 시원하게 후려갈긴 왼쪽 뺨 안에 터진 곳은 없나 꾹꾹 더듬어보며 그가 가져다준 음료를 홀짝였다. 태연한 척 하기엔 너무 아팠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는 지극히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꿨소?”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때린 덕분에 방구석 어디에 굴러가버린 모양입니다, 라고 농을 던지자, 그는 잠시 낄낄대고는, 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며칠이 지났다. 한 번도 그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녹음기를 준비하지도 않았고 종이에 기록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더듬더듬 풀어나가야 하는 내가 곤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째서인지 그와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아니 내가 풀어내다 보면 내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고해성사처럼 내가 잘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는 과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내내, 나는 내가 이렇게 죄가 많은 인간이었나 하는 자괴감에 흠뻑 젖고는 했다. 그는 위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잘못을 뒤집어쓰고 반성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내 감정에 휩싸여 목 놓아 울고 있으면 그는 아무 말 없이 나가고는 했다.
그런 취조가 끝나고 그가 되돌아 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문득 왜 내가 여기서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까를 곱씹어보았다. 내가 일하던 회사는? 집세는 어떻게 하지? 지금 여긴 며칠이고 어디지? 문득 생각하게 되자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너무도 일상적인 고민들이 뭉클뭉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었다.
짐작키로, 밤이 이슥할 때까지 나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날, 그에게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물은, 나와 관련된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파르스름하게 깎은 턱이 누런 조명 아래서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그가 내가 궁금한 것을 듣고 싶다면 이야기를 하라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도대체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호흡을 고르고 또박또박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녀와 나의 연애할 때 이야기, 그녀의 자취방에서 살을 섞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랑하던 감정을 천천히 묘사하고, 첫 애를 가지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차근차근 말을 푼다. 처음엔 그녀에게 가지는 벅찬 사랑의 감정만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힘든 과정이 되어갔다. 형사는 내가 내 아내에 대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랐고,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상처받았던 일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기억 저편에 묻어있던 미움은 내가 그녀에게 잘못했던 일들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사랑을 외던 입술이 끈적끈적하게 말라오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던가를 고민하게 되던 날, 그는 내게 가족에 대해 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나도 내 아내에 대해 묻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내게 찾아오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간다. 당신이 왜 잡혀왔는지 모르겠어. 내게 숨기는 게 있다면 다 이야기 해보는 건 어때? 난 당신에게 뭔가를 들어야하고, 사실 당신과 있었던 일은 전부 보고하니 당신의 이야기 중에 건덕지가 있다면 해명할 방법이나 생기지 않겠냔 말이야. 나는 그렇게 나를 회유하는 그의 말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하지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불안감, 그 불안감은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나는 꿈을 꾼 뒤로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내와는 달리, 나는 아직까지 내가 꿈을 꾸는 여자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아마도 사랑해주었을 여자의 이야기는 내 머리 속에서만 빙글빙글 맴을 돌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게 된 것은, 사랑했던 그녀와 사랑하는 그녀가 아이를 밴 건 아닌지, 아님 자살을 한건 아닌지 였다. 나는 그 꿈과 이후에 무슨 대답을 했던지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대답을 분명히, 분명히 했을텐데. 갖가지 죄책감 속에서, 그 대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꿈을 한번이라도 더 꾸고 싶었다. 대답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는 이제 그가 다녀가고 나면 눈을 감았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온전히 잠든 적은 없었다. 그 뒤에, 대답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떠올릴까 두려웠으니까. 지금 내게는 두 여자가 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은 바뀌고, 이 어둑어둑하고 창문도 없는 방 안에서 난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 음식을 받아먹으며 지냈다. 도대체 시간은 얼마나 지난 걸까. 나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고 죄책감에 억눌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내게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형사의 이름도 모르지만 나는 이 좁은 방 안에서 평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내 죄를 들으러 오고, 대답하지 않고, 나는 이 안전한 방 안에서 숨만 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며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모를 것이다.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니 이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당장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서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악독하고, 위험하고, 대단한 사람인가!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더 이상 이 좁은 방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날 사랑하던 여자와, 내가 그렇게 탐했던 사랑했던 여자를 동시에 떠올리며 같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과정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했던 여자에게 무슨 대답을 한걸까?
삐걱대며 오늘도 문이 열린다. 나는 더부룩하게 자란 수염과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멍한 눈으로 형사를 바라봤다. 나는 방 안에 갇혀, 아니 방 안에 들어앉아 담배연기에 컥컥대며 그에게 이야기를 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바깥에서 쉼 없이 살아가고, 내게 시간을 할애하러 돌아온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내게 그 것은 이곳에서의 유일한 분출구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기쁨인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지. 나는 저 표정이 어떤 얼굴인지 떠올려보려 애를 썼다. 그는 내 앞자리에 앉지 않았다. 어서 앉아주길 바랬다. 나는 어젯밤 그녀의 꿈을 꾸었고 대답을 알았다. 나는 어서 이, 힘든 괴로움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생, 이제 나가도 되요.”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한 석 달 지난 거 압니까?” 그는 익숙한 손길로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뭔가 실수한 것인지 잔기침을 했다. 그는 앉지 않았다.
“위에서 당신을 풀어주라고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립니다. 나가도 되요.”
자자, 어서 나갑시다. 그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 스스로 뭔가를 해치울 생각조차도 못한 채 그의 손에 잡아끌려 바깥으로 나왔다. 딱 한 층을 올라섰을 뿐인데, 내가 있던 창문 없는 지하실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형사, 그가 피우는 담배냄새와 섞여서 까마득한 언젠가에 맡았던 것 같은 냄새가 나를 훑고 지나간다. 파르스름한 턱선의 형사는 꽤 기뻐보였다. 내가 멍청히 서있자 이제 풀려난 것이 기뻐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한 듯, 그는 일단 욕실로 나를 밀어 넣었다. 지금까지 말 안했지만 당신 씻지도 못해서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씻을 동안에는 그는 문밖에서 내가 듣고 있든 말든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그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나는 의문을 가졌다. 저 밑에서 나는 끊임없이 떠들기만 했고 그는 듣기만 했으니까. 이 바뀐 위치는 내게는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나는 그가 손에 쥐어주는 흰 봉투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가 모는 차를 타고서 내 집으로 향했다. 아마 집에 연락이 가 있을 것이라 했다.
“몇 달 만에 돌아오는 사람이 시커먼 차 타고 오면 동네 시끄러울지 모르니 그냥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십쇼. 벌써 집 가는 길 잊어버린 건 아니죠 선생?”
호쾌하게 웃는 그가 싫었다. 그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비뚜름하게 웃고는 인사도 않고 뒤돌아서 척척 나서버렸다. 익숙한 소리, 익숙한 대문을 마주보고서 삑삑대며 문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들어서도 나를 반기는 이는 없었다. 써늘한 공기만이 나를 반겼고, 채칵대며 도는 시계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그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집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입을 열어 꿈을 꾼 내용을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나의 가족이 사는 집에서 나는 이전 여자의 꿈을 큰 소리로 외쳤다.
-어젯밤 일이 기억났다. 별로 다른 날과 다르지 않았다. 난 살짝 취한 상태였고 그녀는 여전히 나에게 붙어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룸에 이끌려 들어간 뒤, 그녀는 내 허벅지에 올라타곤 살짝 풀린 눈으로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몸으로 덤벼들던 그녀가, 그 순간만큼은 순진한 소녀 같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순한 디자인의 귀걸이도 입술에 가볍게 붙어있는 듯한 분홍색의 립스틱도 왜 그렇게 도드라져보였을까. 그래서 그녀가 이끄는대로 이곳으로 왔었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잔뜩 취해서.
꿈 꿨어.
무슨 꿈?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내 몸을 더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다시 나에게 엉겨왔다. 향수 냄새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난 흐릿한 초점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입술에 말라붙은 분홍색의 립스틱은, 다음엔 누구에게 번져갈까. 나는 그녀를 상처 입히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내 것이 되려 노력했으니,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은 싫어졌다.
널 사랑하게 되는 꿈.
그녀의 표정이 써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래, 너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꿈일 뿐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맺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집에서,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고, 넥타이를 꺼냈다. 품 안의 돈 봉투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나는 넥타이를 천장에 매달았다. 더 이상,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부대끼고, 그 것에 상처받고 상처 주며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아내는 아니다. 그녀는 지금처럼, 밖으로 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고 변한 나를 독촉할 것이다. 이전의 그 욕심을, 나 혼자의 독점욕을 알게 된다면 내 아내는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나는 다시는 그런 상실감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나를 사랑했던 그녀는 죽었다.
그 것을 나는 확실히 알았다.
바닥을 박찼다. 내 몸은 허공에 흔들렸다. 이제 고통 받을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아득해져갔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턱이 파르스름하게 빛날 정도로 수염을 깔끔하게 깎은 남자가 돌아와 있었다.
“끝났어요?”
“끝났어요.”
그는 평온한 말투로 대꾸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늘어졌다. 이제야 겨우 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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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못은,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컸다. 으레 사람들이 연못으로 부르기에 다들 연못이라고 부를 뿐, 그 크기만 따져서는 연못이 아닌 호수가 더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사람들을 고집스럽게 그것을 연못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흘러들어온 외지인이 저 호수는 이름이 뭔가요, 하고 묻기라도 하면 그들은 저건 연못이야, 하고 핀잔을 툭 주고는 더 이상 말도 않고 휘적휘적 가곤 했다.
연못보다 작은, 진짜 연못은 물, 로 불렀다. 그들에게 연못보다 작은 것은 연못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붙이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눌러앉은 그것은 어그러진 기준임에도 어색함조차 없다고, 설명하기조차 힘든 호수는 연못이라 이름 붙여져서, 이름도 없는 연못이 되어가고 있다. 아주 평범한 이곳에서 연못의 존재는 비일상을 상정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비일상이라 하면 나도 만만치는 않았다. 나는 외지인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외지인이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흘러들어와 오래도록 이 마을에 머물렀다. 하지만, 바깥에서 스며든 어머니는 그 마을의 사람이 될 수 있을지라도 나는 언젠가 이 자리에서 풀려나갈 실오라기 같은 존재였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품어주었지만, 자란 뒤의 떠난 나는 내가 다시 내 발로 돌아올 때까지 외지인이라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외롭게 자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마을에 가진 기억은, 마을에 다닌 것보다 동네 할미들 품을 돌아다닌 것이 더 많았다. 할미들은 마을에 얼마 없는 작은 아이를 싸고돌았다. 치마폭에 싸여 있던 나는 어느 때는 우리 어머니보다 동네 할미가 더욱 어머니 같았다. 도시물 먹은 어머니는 흙빛으로 손을 물들이는 때가 많았고, 집에 돌아오면 누워버리기 일쑤였다. 피로한 어머니 대신, 나는 읍내의 학교를 다녀오고 난 뒤에는 늘 할미들의 품에 안기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상하다 여기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기억속이 할미들은 갈라진 손등과, 흙냄새와, 손톱 밑에 까맣게 끼인 흙때로 기억에 남아있다. 사실 할미들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햇살이 그녀들의 이마에 깊은 주름을 팠을지 누가 아는가. 사실은 젊은 이였을지 누가 아는가.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할머니, 할머니, 하며 쫓아다녔고 그들은 그냥 나를 들어 안고 품에 품어주었다. 그 미소가 다시 없이 푸근했다.
할미들은 속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나씩은 품고 있었다. 할미들 품을 돌아가며, 돌아가며, 몇 번이고 귀를 기울이다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고 옷섶을 잡고 졸라대면 할미는 젊었을 적 일이었지, 하며 저 먼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그 젊었을 적이, 자신의 젊었을 적인지 혹은 그 누군가의 젊었을 적인지는 입을 대지 않았다. 으레 그래왔기 때문에 나는 익숙한 자세로 할미의 품에 안겨 입에 사탕을 물고는 했다. 그럼 할미들은, 조곤조곤 시간을 되씹으며 애정 어린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오랜 시간동안 눈앞에 선하게 그려주던 기억은 날이 갈수록 온전히 내 기억이 되어가는 듯이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느 기억이든 흐려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기억 너머로 사라져 가는 것, 귀퉁이 버석버석 으스러져 가는 것,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문드러져가는 기억들 사이에서 나는 연못의 이야기를 유난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래된 무엇인가가 늘 그렇듯이, 그 연못은 건드리면 바삭바삭 부서져 내릴 것 같은 푸르스름한 이야기를 안고 있었다. 물빛인지, 아니면 하늘빛인지 모를 푸른색으로 물들인 연못은 그 위에 구름 몇 개를 띄우고 잔잔히 있었다. 그녀는 그 잔잔함 위에 동그란 돌을 던지고, 퍼지는 동심원이 어디까지 퍼져나가나 찬찬히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대뜸 던지는 물음은 엉뚱했다.
연못에는 뭐가 살고 있을까?
발끝으로 찰방찰방 물을 튀기며 한숨같이 묻던 그녀는 일주일 뒤 팔리듯이 시집을 가야했다. 아득한 눈으로 연못 너머의, 몇 개고 몇 번이고 넘어가야할 재를 세며 그녀는 내게 물어왔었다. 그럼 나는 무슨 실없는 소리냐며 웃음을 짓고,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다시 쳐다보며, 말해봐. 연못, 우리 연못에는 무엇이 살고 있을까? 하고 묻는 것이다.
같이 자라온 나는, 내내 함께 붙어 다니던 우리는 이 질문을 몇 번 하고 몇 번을 대답했던가. 도대체가, 몇 번이고 주고받는 그 대화가 질리지도 않는지. 나는 슬며시 생각해보는 척 하다가 대답하는 것이다. 이 대화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듯이 잔뜩 귀찮은 투로. 내가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연못이니까 산신령이 살 거야.
원하는 대답을 들은 그녀는 슬쩍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나를 쳐다본다. 유난히 그 얼굴이 우울해보인 것은, 하고 생각해보다가, 에잇, 쓸데없는 생각이지 하고 벌레를 쫓듯 고개를 휙휙 저으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서는, 그녀는 또 방긋이 웃는다. 그 미소가 반가워서 좋다. 그 미소는 변한 적이 없다. 기억 속에서 빛이 바랠지언정 그 미소는 변하지 않는다.
여긴 산이 아닌걸.
그럼 나는 콧방귀를 뀌고는 올라있던 돌덩이 아래로 뛰어내린다. 발밑의 흙은 한참동안 계속되어버린 가뭄으로 팍팍하다. 입 하나 줄이겠다고 내보내는 그녀는,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는 툴툴 대답하는 것이다. 괜히 그런 거나 물어본담? 이제 곧 못 볼지도 모르는데, 하고 결국 생각해버린 나는 잔뜩 골이 났다. 평소보다 더 독하게 말을 뱉고는 뒤를 돌아가 버렸다.
아님, 산신령님들 집합소겠지. 온통 재뿐이잖아. 전부 모여 마작이나 하시라지. 가자.
내가 버럭 소리를 질러 재차 그녀를 부를 때까지, 그녀는 또 오래오래 연못을 보고 있었다. 가뭄에 쪼그라든 연못은 마을사람들이 퍼다 써서 쪼그라들었겠지. 그래, 입 하나 줄이라고 멀리 가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 못 건넬망정 퉁명스레 이야기한 것을 나는 후에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결혼을 할 날 새벽이었다. 몰래 그날 신을 꽃신을 손에 들고 그녀는 허겁지겁 흙발로 뛰어갔을 것이다. 신발 바닥에는 흙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 알려준 것이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듯이 신발코를 마을 쪽으로 돌려놓고, 내가 자주 앉아있던 그 바윗돌 위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연못에 그녀는 꼴깍 몸을 던졌다. 허겁지겁 뛰어 도착한 연못의 돌 위에는 가지런한 꽃신, 손대면 이제 막 벗은 듯 따스함이 느껴질 것 같은, 꽃신과, 산신령들에게 화투 가르치러 간다는 정갈한 글씨만이 남아있었다. 남기는 것을 유난히 싫어한 그녀는 그 추위에 곱아가는 손으로 눈 위에, 봄이 오기도 전에 사라질 글씨만 남겨놓고 갔다.
꽃신을 남겨놓고 간 아이가 꽃신을 두고 간 곳은 꽃이 필 수 없는 돌덩이 위였다. 눈 위에 손으로 그려놓은 글씨도 봄이 오자 그야말로 눈 녹듯이 없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이제 눈도 녹았으니 살풀이굿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미는 시체를 건지지 않았다. 그 부분에 만큼은 더없이 완강했다. 해쓱하게 패인 뺨과, 부스스한 머리로 방 안에 틀어박혀있다가도 어느 날은 훌훌 털고 일어나 마을을 돌아다니고는 했다. 실성한 듯 실성하지 않은 듯 그녀는 홀쭉한 뺨으로 비실비실 미소를 짓고는 했다. 하지만 그 눈은 번쩍번쩍하니,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제 딸 손대지 말라는 짐승 같다고 수군거리는 말도 심심찮게 들렸다.
결국 나선 것은 마을 제일로 나이가 많은 할미였다. 여보게, 자네 딸 춥지 않은가. 겨울에 바로 건져주지 못한 것은 미안하지만, 이제라도 데려와서 땅에 재워줘야지. 조곤조곤, 입을 오물대며 이야기하는 할미에게 어미는 심기 불편한 것을 드러내기 힘들었지만, 흉흉한 기운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꽉 쥐고서, 손가락 마디마디 하얗게 번지도록 꽉 쥐고서 간신히 내뱉은 말은 무척이나 유했다.
제풀에 가르치다 지치면 올라오겠지. 제까짓 게, 에미한테도 이겨 못한 게 누굴 가르치남.
그 말만 툭 던지고 뒤돌아 성큼성큼 나가는 어미를, 아무도 불러 세울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누군가가 한두마디 불평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곧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기세는 차마 붙잡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품고 있었다.
꽃신을 남겨놓고 간 아이가 꽃신을 두고 간 곳은 꽃이 필 수 없는 돌덩이 위였다. 그 자리에는 늘 꽃신이 있었다. 날이 가고, 주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계절이 가고. 비바람에 닳아빠질 즈음 되면 늘 꽃신은 새신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어미는 늘 그 자리에 꽃신을 두었다. 날이 가고, 주기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계절이 가고. 꽃신이 비바람에 닳아빠질 즈음에는 장봐오는 어미의 등짐 옆에는 고운 꽃신이 달랑달랑 매달렸다.
내 딸 맨발로 돌아오진 말아야지. 또 겨울이면 어찍해.
어느 누가 그 꽃신을 왜 사오느냐 눈치 없이 물으면, 주름진 눈가를 착착 접으면서 어미는 웃음을 지었다. 한숨 같이, 바람 같이, 흘러가며 그렇게 대답하는 말에 싣는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던가.
가슴 한 켠이 아릿하도록, 볼 때마다 검버섯이 피는 손등과 눈가와, 주름져 닳아가는 어미는 자신의 아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눈물 나도록 젊은 날의 그와 흡사했다. 더없이 쓸쓸한 눈빛으로, 하지만 더없이 사랑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이를 읊을 때면 나조차도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을 겪었다. 겪었다고, 검버섯이 피는 할미는 내게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말을 하는 할미의 눈가에는 글썽글썽 눈물이 맺혀있을 때가 많았고, 나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으레 울었다.
지금 나는 연못에 와있다. 할미들은 많이도 갔고, 이제 나는 할미들에게 아주머니, 하고 불러야할 나이가 되어서야 이 마을에 돌아왔다. 하지만 어렸을 적의 기억이란 그리도 오래오래 남아있었다. 나는 호수 같은 연못인지 연못 같은 호수인지 나는 그것이 품은 이야기가 눈물 나도록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키는 날엔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며칠을 몇 날을 거기에 앉아있었는지. 머리가 굵어져도 풀벌레 개구리 숨죽일 줄 모르고 왁자히 떠들어대는 연못가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미친놈처럼 떠들어대었다. 사랑하는 친구야 너는 어떻게 지내웁고 있느냐, 연못에 죽은 처녀야 너는 아직도 화투를 치고 있느냐. 비일상의 세계에서-일반적인 상식의 세계와 줄을 그어 놓은 듯한 연못가에서 난 계속 중얼중얼 무엇을 하였던가.
시간을 줄줄 쏟아 내다보면 나는 갖가지 생각만 둥실둥실 떠올렸다.
꽃신을 신고 쪽을 찌고 고운 신부복 차려입고 가채를 올리고 연지곤지 찍고 나면 그녀도 고와서 참으로 환했을 것이다. 싫은 이에게 시집을 가도 꽃단장하고 피어나야했을 그녀는 참담하게 아름다웠으리라. 부서지는 마음을 또닥또닥 분칠로 덮으며 그녀는 방긋이 웃었으리라.
뛰어든 그녀와 꽃 같은 그녀가 어느 쪽이 옳은가는, 꽃신을 신고 뛰어든, 혼자서 몰래 할 수 있었을 꽃단장을 하고 떠난 그녀를 위해 판단하지 않았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나이가 이쯤 된 후에도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하였다. 단지 내가 해야 할 것은 아무도 위해주지 않는 그녀가 돌아올 길을 위해, 사랑받았던 그를 위해, 이제 아무도 얹어놓지 않는, 바윗돌 한 켠에 꽃신 한 켤레를 두고 오는 것뿐이다. 당신은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고, 사랑받고 있다고, 말해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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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기 직전엔 늘 흙냄새가 난다. 방금 도착한 이곳도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흐릿한 흙냄새가 스쳐간다. 하얗게 돋아 올랐던 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회색으로 뭉그러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비릿한 물비린내로 바뀔 냄새를 나는 한숨 가득 들이마셨다. 눅진한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아직도 눈에 박힌 듯이 선연한 그 모습은 눈만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었다. 역사 밖에서 뻗어오던 흐릿한 햇살과, 걷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의 하얗게 부신 목덜미. 함께 골랐던 원피스, 그 아래로 곧게 뻗어 내린 종아리는 떼를 써 신고 온 높은 구두 때문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흐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래서 그렇게나 즐겁게 쓰고 왔던 넓은 챙의 밀짚모자. 걸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 않고 들고 왔던 하얀 가디건. 어색한 구두를 길들이려 그녀는 몇 번이고 신발을 고쳐 신었었다. 셔터 소리에 고개를 틀어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미소를 짓던 그녀는 내 눈에는 다시 없이 아름다웠었다.
「나 사진 찍는 것 싫은데.」
「예뻐서.」
「-빨리 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나면 그녀는 으레 그 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입을 비죽대며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붉게 번져오는 뺨으로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슬몃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걸음이 느려진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내가 뻗은 손에 꼭 마주잡아오는 손은 늘 뜨거운 온기를 담고 있었다. 기차에 탄 뒤에도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나는 그녀의 도톰한 손끝을 그리도 사랑했었다.
그 때 나는 역사 안에서 입맞춤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기차역 안에는 습기 찬 공기가 가득했다. 외려 그것은 그녀의 체취를 더 또렷하게 맡게 해주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있던 내게 그녀는 언제나 큰 고민을 안겨주었었다. 보석같이 다루고 싶다가도 한걸음만 나서면 무너뜨리고 싶었다. 평정을 가장한 것인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흔들려 손을 뻗어 그녀에게 닿을라치면, 내 욕심스런 생각을 그녀는 한 치도 모르는 것처럼 내게 미소를 지어오고는 했었다. 나는 숨을, 욕심을 삼키고는 웃어주었었다. 물에 젖은 풀잎 같은 미소는 언제나 좋았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오두막은 주저앉아 있었다. 그 성기어진 지붕과 삐걱대는 기둥은 이제 사람이 기댈 곳이 아니었다. 나무 썩어가는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곳에 내 기억 한 겹만 덧씌우면 될 일이었다. 끌어안고 온 기억이 그렇게 쉬이 실망할 것이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그 날, 배에서 내려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날은 갑자기 날이 흐렸었다. 걱정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그저 즐거워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짠 내음이 난다며 높은 구두를 신고 앞서 뛰어나간 그녀를 쫓아 뛰어갔었다.
「가자!」
「어딘 줄 알고 그렇게 뛰어가는 거야, 다쳐! 뛰지 마!」
「빨리 와! -어?」
아차, 하는 사이 기어코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졌다. 하필 가게 하나 없는 한산한 곳이었다. 그 때 발견한 것이 이 오두막이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조차 감사하며 뛰어들었지만 그 때 나는 한껏 심통이 났었다.
「조금만 천천히 갔더라면 비 맞을 일도 없었잖아!」 내 윽박에 그녀는 대뜸 함박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너무 좋아서. 비 맞아서 짜증은 나는데,」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비가 팔뚝을 타고 흘러 팔꿈치에서 떨어진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어. 그런 기분이야. 빗소리만 가득해서.」
비로소 나는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외투를 벗어 어깨에 둘러주며 또 나는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아, 진짜.」
다 젖었다며 투덜대는 그 목소리에 아예 등을 돌려 앉아버렸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고개 돌리고 있어? 화 많이 났어?」
「화 난거 아니야.」
「그럼 이쪽 좀 봐봐, 왜 그렇게 등 돌리고 앉아있어?」
「민망하니까 저쪽 보래도!」
그제야 그녀는 얌전히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찰나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깨 위로 그녀의 머리가 툭, 기대왔기 때문이다.
「고마워.」
「…….」
나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때야말로 비로소 그곳에는 그녀와 나밖에 없었다.
그 숨소리와, 숨냄새와, 어깨와 팔뚝으로 건네져오는 체온.
비가 갠 뒤에도 우리는 오래도록 그 곳에 앉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녀와 앉아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쓸어본 그 곳에는 체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도 또렷한 기억은 머리 속에 남아있을 따름으로, 그것이 더 없이 슬퍼 나는 카메라에 낡아버린 오두막을 담고서 뒤돌아 걸어 나오고 말았다.
해변 아무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충분했다.
숙소만큼이나 낡아버린 파라솔과 의자에 걸터앉아 울렁이는 바다를 멀리 바라보며 울컥 치밀어오는 것을 삼켰다. 혼자 앉은 내가 외로울 따름이었다.
주름진 손등과 낡은 카메라는 흑백 빛바랜 사진처럼 시간에 퇴색된 그대로다. 곱씹기에도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저 외로웠을 뿐이었는데. 그녀도 그저, 그녀대로 외로웠을 뿐이었을 것을. 건너뛴 시간은 너무도 공허했다.
주저앉은 벤치에서는 짠 바다 내음과, 낡은 플라스틱 냄새가 밀려온다.
하늘은 비가 오지 않은 채로 바다 건너부터 뿌옇게 햇빛이 번져오고 있었다.
다시는 똑같은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부딪히지도 못할 채로 망가져버린 사랑은 물얼룩처럼 가슴에 번져있다.
아득하게 추억하는 그녀에게 끝까지 건네지 못했던 말을 또 가슴 속으로 삼키며 눈을 감았다.
흐릿하게 눈물에 번져버린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다시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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