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극장/ 팬픽

2015/08/16 마비노기

꽃양배추 2018. 4. 23. 07:20

딱히 이 에린에 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머리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세상에 정붙이기도 전에 짐보따리 하나만 짊어지고 마을 밖으로 쫓겨난 것이 겨우 열살이 되었을 때였다.  자신이 태어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은 머리의 엘프는 이유불문 태아나자마자 죽이는 것이 불문율. 아트라타가 살아있는 것이 놀라운 것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의 처지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토닥여주던 부모의 손을 쳐내고 싶었다. 제 자식을 내치면서도 안도감이 흐르는 그 표정과 얼굴. 두 번 다시는 보고싶지 않았다. 죽어도 마을 밖에서 죽으리라고 소년은 다짐했었다.

성마른 표정의 여행자는 기꺼이 자신을 바다 건너로 데려다주었다. 단지 그것이 다였다. 말라붙은 빵쪼가리만 씹고, 목이 말라 죽겠다고 매달리면 간신히 물 한모금을 주었다. 그래도 돈만 집어삼키고 사막에 버려놓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그와 헤어지던 날, 무슨 짓을 하던 살아남으라고 했고 소년은 그의 돈주머니를 훔쳤다. 그가 내준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을을 떠나 처음으로 뜨거운 빵을 우유와 함께 먹던 날, 소년은 돌로 바닥이 깔린 마을 구석에서 엉엉 울며 빵을 삼켰다. 이제야 그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을 알았다. 아마 마을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부모는 처음부터 자신의 뒤를 쫓지 않았다. 자신을 데려다 준 여행자와는 아마 평생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번잡한 마을에서 소년은 그제야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그 뒤로는 살기 위해 살았다. 몇번 더 여행자의 주머니를 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별로 좋은 수입은 아니었다. 여행자를 소매치기한 돈으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른 마을로 떠난 그는 성실히 일했다. 손 끝이 부르트도록 밀을 베고, 우유를 짰다. 아무리 푼돈이라도 내 몸 뉘일 자리 하나라도 얻을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안도감을 주었다. 여관의 침대에 누운 처음에는 베겟잇을 눈물로 적셨지만, 해가 가고 나이를 먹으며 내일을 위해 한숨이라도 더 자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햇볓에 타 메마른 표정을 한 채로 소년은 나이를 먹었다.

여느 때와 같이 침대에 몸을 파묻던 그날 밤에, 흰 날개의 신은 침댓머리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내친 엘프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던 신의 얼굴은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포워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넌 영광을 쥐게 되리라고 신은 약속해주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댓가로 키홀은 소년의 등에 자신과 같은 날개를 돋게 해주었다. 처음으로 힘을 쥔 소년은 포워르 군단의 선봉장이 되었다.   


전장을 같이 헤쳐왔던 스태프는 온통 금이 가서 엉망이었다. 아마 한번만 더 함을 썼다간 부서질 것이다. 바닥에 내던지면 깨질듯이 위태로운 모양을 한 그것을 손에 그러쥔 그는 황망히 서있었다. 바닥을 짚은 지팡이에 몸을 거의 기울이듯이 기댄 채로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탄하기보다는 안심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여신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키홀의 힘을 '나눠'받은 정도의 자신으로서는 이길 방도가 없었다. 그냥, 나를 기대고 서있던 포워르들이 학살당한 것이 슬플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와중에도 아아, 이제 나는 누군가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구나 안도하는 스스로가 역했다. 키홀이 자신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했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지휘관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다고, 청년이 된 소년은 생각했다.

모리안이 자신을 아본에 유폐시킨 것이 자비에서 우러난 행동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미력한 '신'의 힘이라도 그것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 행동일 것이다. 검은 날개를 퍼득이며 전쟁이 그에게 다가오는 날, 이제는 제 몸과 같은 날개를 집어뜯기고 엘프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오랜만에 허공에 뱉은 엘프어는 몹시도 어색했다. 청년은 다시 입을 꾸욱 다물었다. 

내게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있을 수도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침대에 몸을 파묻던 그날 밤에, 흰 날개의 신은 침댓머리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내친 엘프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던 신의 얼굴은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포워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면 넌 영광을 쥐게 되리라고 신은 약속해주었다. 그때가 되면 온갖 영광된 말이 너를 칭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겨워 그는 그 손을 잡았다.


모리안은 선봉에 선 그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일갈했었다. 어째서 투아하 데 다난이 포워르의 편에 섰냐고 했다. 나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지팡이를 휘둘렀고, 온몸으로 부딪혔다. 그리고, 졌다.


내게 부끄럽지 않냐고 묻기 전에, 내가 키홀의 손을 잡기 전에 검은 날개의 당신은 내게 손을 내밀었어야 했다.

나는 부끄러움을 배우기도 전에 모두에게 버림받았으므로, 당신의 가호 따위 받아본 적도 없다고 대답해줄 것을.

온갖 영광된 말보다도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삶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말해준 것은 그가 유일했으므로, 소년은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아마 그 날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키홀의 손을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