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극장/ 팬픽

2015/08/01 마비노기

꽃양배추 2018. 4. 23. 07:19
소년이 집을 떠나며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음을 틈타 마을을 떠나기로 한 옆집의 부부에게 자신을 맡긴 부모는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던 자신을 끌고 나와주지 않았다면 소년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조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제 또래의 친구가 있었고, 옆집의 부모가 미리 준비해둔 덕에 등짐을 메고 가는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물론 제 부모도 미리 준비해둔 것이 있었지만 그 것은 추후를 위한 준비였다. 서로 교류가 깊었던 탓에 저를 버리지 않고 데려가는 것만으로도 옆집 부부에겐 감사할 일이었다. 물론 부모님이 그들에게 넘겨주었던 식량들과 패물은 눈을 감고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열댓살의 소년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쉬울 나이였다.

여장을 풀고 질겅질겅 씹히는 육포를 씹는다. 소는 제 친구의 고기로 된 것을 씹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풀을 질겅질겅 뜯고있다. 우마차에 엉덩이를 걸치고 친구와 함께 발끝을 끄덕끄덕 흔들던 소년은 문득 눈물이 났다.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순식간에 뛰어내린 소년은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근처 구경하고 올게요! 가자!"
"빨리 돌아와야한다!"

아줌마가 외친 말은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떠돌아 흘러가고, 소년은 친구와 함께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채로 앞으로, 앞으로 내달렸다. 부모님은 어떻게 됐을지, 자신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떠올리게 되면 뛰어 도망치는 것은 그의 버릇이 되었다. 동리에서 손꼽아 발이 빠른 그였기에 그 방법은 더욱 잘 먹혔다. 숨이 턱 끝에 차도록 달리고 또 달리다 바닥을 한번 구르고 나면 눈 앞에 들이차는 하늘이 머리 속을 뻥 날려버리는 것이 좋아 소년은 오늘 도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이상한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아무리 소년이 빠르다 하더라도 어린애 걸은은 오십보 백보. 딱 한번 숨이 차고 나면 으레 자신의 친구는 숨을 몰아쉬며 휘청이는 다리로 자신 뒤에 따라붙어 있어야했다. 그랬어야 하는 친구가 없었다. 당황해 뒤를 돌아보고 친구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어스듯한 언덕 위에 가느다란 인영이 거의 날듯이 자신에게 덤벼왔다. 히익, 숨을 몰아쉬며 엉덩방아를 찧자 자신 앞에 덜컥 멈춰 몸을 일으킨 그것은 희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짐승인가 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마구 흐트러진 검은색 머리칼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등허리께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몹시도 지저분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끔뻑이는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넌 뭐야, 꼬맹아."
"어.."
"뭐냐고 물었어, 꼬맹아."

미친여자다. 그렇게 몇번 묻고는 혼자서 웃는 모양이 심상치 않아 소년은 그녀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이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넘어진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 그녀를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관찰하던 소년의 얼굴은 곧 붉게 달아올랐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지, 그녀는 간신히 '입었다'고 말할만한 옷을 걸치고있었다. 두텁고 질겨보이는 옷감이긴 했지만 엉덩이께부터 허벅지까지 얼기설기 꼬매어져 있을 따름인 치마 부분은 의복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가 의문일 정도였다. 어깨로 줄줄 흘러내리는 상의는 그녀의 젖무덤을 거의 다 드러내놓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모로 꼬고는 그 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저, 제 친구 못보셨어요? 저랑 키 비슷한 남자앤데."
"너도 남자애면서 말을 참 이상하게 하네, 꼬맹아."

또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키들키들 어깨를 떨며 웃는 그녀를 상대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여상스레 몸을 일으킨 소년은 넘어진 엉덩이를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만 빠꼼히 젖혀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무시할까 말까 고민하던 소년은,

"제 친구 못보신 것 같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

하고는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하지만 여자의 한마디가 소년의 발목을 덜컥 붙잡았다.

"맛있었지."

휙 돌아보는 소년을 여자는 허리께에 손을 얹은 거만한 자세로 맞이했다. 그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의기양양한 미소가 흠뻑 번져있었다.

"소년의 친구 말이야, 작고 어린 남자애. 너보다 조금 작은 작은 남자애 말이야."

휘청, 그리고 또 휘청, 곧 쓰러질 것 같은 발걸음으로 소년에게 거리를 두고 여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맨발은 상처투성이. 살짝 끌었다가, 그야말로 짐승처럼 날랬다가. 주문처럼 중얼중얼 말을 뱉으며 여자는 소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너풀거리는 치맛자락과 흔들리는 가슴께가 마구 소년의 시선을 잡아끈다. 귀를 파고 들어오는 새된 여자의 목소리는 그가 발걸음도 옮기지 못하도록 온몸을 칭칭 감아붙이고 있었다.

"작고, 또 작고, 너무 말라서, 살도 별로 없었지만.'
"먹었다구요?"
"그래! 먹었어. 야들야들한 살과, 눈물이 그렁그렁 찬 불쌍한 얼굴이 봐줄만 했단다, 꼬맹아."

훅 다가와 얼굴을 붙들고 그녀는 얼굴 앞에서 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붙잡힌 소년이 당황해 몸을 뒤로 빼려고 해도 무슨 힘이 그리도 좋은지. 킥, 킥, 웃음을 지으며 여자는 그를 관찰하는 듯 보였다. 소년은 이제야 무서움을 느꼈다. 여자라서, 몸가짐이 제대로 되어보이지 않는 여자라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그냥 이 여자는 위험했다. 소년은 몸을 뒤틀며 마구잡이로 말을 뱉었다.

"거짓말 하지마, 사람을 어떻게 잡아먹어 이 미친년아!!!놔!!!놔!!!!!"
"왜 못잡아먹어?"

진심으로 묻는듯한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왜 못먹냐고? 이제 소년은 거의 악을 쓰고 있었다.

"사람이잖아! 너도, 나도, 내 친구도 사람이잖아!!!"

그 말을 들은 순간 여자가 웃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자신의 머리를 꿀꺽 베어물 것 같이, 새하얗게 빛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마녀니까, 상관없는 얘기네!"
"놔!!!!!!!!!!!!!!!!!"

그녀를 겨우 뿌리치고 소년은 원래 있던 자리로. 앞으로, 앞으로. 등 뒤에서 터져나오는 광소가 소년의 발을 얽어맨다. 아핫, 아하핫, 아하하하하핫! 새되게 하늘을 찢는 목소리가 마구 부풀어 그의 등을 떠민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까지 도망쳤지만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귀에 엉겨붙어 소년은 귀를 틀어막고 달렸다. 친구가 잡아먹혔다는 말을 믿을까보냐. 하지만 정말 잡아먹혔다면 나는 이제 어쩌나. 흐트러진 마음 안으로 괴로운 고민들이 마구 헤집어 들어와, 자리로 돌아온 소년이 자신의 친구와 마주했을 때 결국 그는 집을 떠난 뒤 처음으로 목놓아 울었다.

그날 밤 소년은 꿈을 꾸었다. 흰 살갗이 온통 드러난 채로 마녀는 자신의 곁에 누워있었다. 어쩐 일인지 자신도 온통 알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얼어있으려니 마녀는, 자신의 몸 위로 올라와 소년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헉, 숨을 뱉으며 눈을 뜬 소년의 아랫도리는 축축했다. 낮에 너무 뛰어 끈적이는 탓에 잠이 깨버렸다는 핑계를 대며 소년은 시냇가로 가 몸을 씻고, 옷을 빨았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어른이 된 소년은 시커멓게 물든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마녀의 번득이던 눈동자같이 보여 훽 고개를 돌린 소년은 젖은 몸을 깔짚에 파묻으며 부모의 생각을 했다.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은 몹시도 지루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