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극장/ 팬픽

2015/07/30 마비노기

꽃양배추 2018. 4. 23. 07:18

처음에는 그저 경이의 연속이었다. 처음 얻었던 팔라딘의 힘도 놀라웠지만 이것은 차원이 달랐다. 베어진 상처는 눈 앞에서 아물고, 몇번 쓰고 나면 지쳐서 한소끔 쉬어야했던 기술도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다. 날듯이 가벼운 발걸음은 내게 고양감을 안겨주기 충분했었다. 이 '신의 힘'으로 다른 이를 돕기가 몇번이었는지. 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인 힘이었다. 매료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내가 이런 몸이 된지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나의 시간으로 열흘이 좀 더 지난 일을 마을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무서움을 느꼈다. 밀레시안들이 우리들, 투아하 데 다난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익히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왜인지는 알고있지 않았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들과 같은 투아하 데 다난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나는 무한한 시간을 살아가야하는 '특별한' 처지였다. 비로소 깨달았다. 나도 잊어가고 있었다. 모두와 같이 잊어가던 내가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게 두려웠다. 난 이제 밀레시안과 같았다. 내가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투아하 데 다난, 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은 나를 차근히 잃어가는 것이다. 아마도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어라,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고 떠올리고는 그대로 다시 잊어버리겠지. 저런 것을 내가 모르고 주욱 살았다면 모르되 안 이상 그것을 목도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잊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도피했다.


이후로는 일부러 마을을 피했다. 그러고는 밀레시안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밀레시안들은 나를 무척 반겼다. 신의 힘으로 인해 밀레시안 이상으로 튼튼해진 육체는 그들에게 아마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그들이 반긴 점은 내가 그들이 한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억력의 한계가 있으니 '정말로 잊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여타 투아하 데 다난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스레 모든 것을 무로 돌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만나 저번주에 있던 이야기를 건네도 난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도 달가웠다. 처음엔 밀레시안의 휙휙 바뀌는 모습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내게는 무한한 시간이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처음엔 다른 밀레시안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밀레시안은 영생에 '가까울'뿐 영생은 아니었다. 아무리 경이로운 육체를 지녔다 하더라도 다치면 쉬어야했고 음식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그들에겐 나와 같은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다. 여신 모리안의 힘을 빌어 그들은 자주 육체를 바꾸었다. 그들은 그것을 '환생'이라고 불렀다. 영혼은 그대로, 하지만 새로운 육체로 계속 바꾸어가며 그들은 스스로를 날카롭게 벼린다. 그런 그들에 비하면 나는 그저 튼튼한 일반인 정도일까. 경이로운 성장 속도를 보이는 밀레시안에 비하면 나는 몹시도 정체되어 있었다. 함께 그림자 세계를 모험하던, 그들이 서로를 추스르고 있을 동안 모든 포워르를 정리하고 손을 내밀던 나는 이제 없었다. 내가 숨을 몰아쉬며 하나를 끝내고 나면 이미 나머지 포워르들은 검은 연기가 되어 바닥에 나뒹구르고 있었다. 그들은 괜찮다며 등을 다독여주고는 했지만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샌가부터 던전에서 앞서 가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숨겨진 장치를 찾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었다.

그리고 난 뒤 일어난 일은, 그래. 몹시 불행한 사고였다. 그랬어야 했다.

라흐 왕성의 모습을 하고있던 그림자 세계에서 공중으로 부유한 비퍼를 떨어뜨리기 위해 쏘아올렸던 화살이 샹들리에를 스쳤다. 휘청이던 샹들리에는 흔들려 떨어졌다. 하지만 포워르에게 발목을 잡혀있던 나는 그 샹들리에를 피하지 못했다. 찢어지는 비명이 귀를 관통하는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어라, 이게 갑자기 왜이러지, 하고 생각하던 순간 다시 시야가 트였다. 눈 앞에 나와 함께 그림자 세계에 들어왔던 이들이 날 바라보던 눈빛에 담긴 것은 공포와 혐오였다. 왜 갑자기 그런 눈으로 날 보는거야. 아, 혹시 내 옆에 비퍼가 짜부러져 터져 죽기라도 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앞으로 뻗고, 꺼내줘, 라고 말할 참이었다. 목소리가 안나왔다. 새액...색.......... 괴상한 바람새는 소리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밀레시안 중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화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곧 꺼내줄게'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내 목을 들어 뒤쪽으로 방향을 돌려주었다.


입밖에 움직일 수 없음에도 나는 몹시 요동을 쳤다고 했다. 샹들리에 아래 으스러진 내 몸은 신의 힘, 그 저주스러운 것의 능력으로 꾸득뚜득 소리를 내며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몸을 찍어내린 샹들리에 때문에 몸은 으스러지기와 다시 달라붙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여 유리조각을 뱉어내며, 박살낸 뼈를 합치며 내 몸은 징그럽게 움직였다. 내 목의 방향을 돌려준 밀레시안이 힘을 주어 샹들리에를 밀어내자 뼈와 살이 뭉그러져 바닥에 붉은색 줄을 그렸다. 그것도 잠시, 내 몸은 꿈틀꿈틀 움직여 제 모양대로 엉겨붙었다. 그 모습을 관망하던 다른 이들이 으깨진 내 몸에 달라붙어 치료마법을 들이부었다. 흰색의 빛이 내 몸에 빨려들어간다.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라붙기 시작한 내 몸은 이윽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하게. 내 머리를 들어 목에 갖다 붙이는 순간, 나는 그제야 목청껏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그 이후는, 다른 밀레시안이 빌려준 로브만 한벌 두른채로 던전 구석에서 덜덜 떨고만 있었을 따름이었다. 목이 떨어져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육신의 고통이 한번에 쏟아진 탓이었다. 동정과, 방금 본 광경에 대한 혐오감이 뒤섞인 눈빛으로 보는 밀레시안들. 애써 웃어보려도 해도 뺨의 살갗이 떨어져나가는 더러운 감각이 느껴져 나는 그저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이제 나는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을 안에서 비를 피하고, 모래알을 삼키는 기분으로 음식을 입에 쓸어넣고, 망연히 허송세월할 뿐. 그저 내가 하는 것은, 아튼 시미니에게 매일매일 찾아가 기도를 올리는 것 뿐이다. 아무 것도 잊지않는, 신의 힘을 나눠 받은 투아하 데 다난. 지금도 종종 나를 처음보는 밀레시안들은 내게 말을 건다.


이봐요, 당신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서요. 나는 이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로워요.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래요?


그럼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날 기억해봐야 당신에게 좋을 것은 없을겁니다. 이렇게 종종, 마을에서 만나면 인사나 나누는게 어때요.


나는 전능하다는 아튼 시미니에게 기도를 올릴 뿐이다.


죽여주세요.


그것이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