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양배추 2014. 1. 26. 22:10

비오기 직전엔 늘 흙냄새가 난다. 방금 도착한 이곳도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흐릿한 흙냄새가 스쳐간다. 하얗게 돋아 올랐던 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회색으로 뭉그러져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비릿한 물비린내로 바뀔 냄새를 나는 한숨 가득 들이마셨다. 눅진한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아직도 눈에 박힌 듯이 선연한 그 모습은 눈만 감으면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었다. 역사 밖에서 뻗어오던 흐릿한 햇살과, 걷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의 하얗게 부신 목덜미. 함께 골랐던 원피스, 그 아래로 곧게 뻗어 내린 종아리는 떼를 써 신고 온 높은 구두 때문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흐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래서 그렇게나 즐겁게 쓰고 왔던 넓은 챙의 밀짚모자. 걸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 않고 들고 왔던 하얀 가디건. 어색한 구두를 길들이려 그녀는 몇 번이고 신발을 고쳐 신었었다. 셔터 소리에 고개를 틀어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미소를 짓던 그녀는 내 눈에는 다시 없이 아름다웠었다.

 

「나 사진 찍는 것 싫은데.」

「예뻐서.」

「-빨리 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나면 그녀는 으레 그 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입을 비죽대며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붉게 번져오는 뺨으로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슬몃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걸음이 느려진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내가 뻗은 손에 꼭 마주잡아오는 손은 늘 뜨거운 온기를 담고 있었다. 기차에 탄 뒤에도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나는 그녀의 도톰한 손끝을 그리도 사랑했었다.

그 때 나는 역사 안에서 입맞춤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기차역 안에는 습기 찬 공기가 가득했다. 외려 그것은 그녀의 체취를 더 또렷하게 맡게 해주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있던 내게 그녀는 언제나 큰 고민을 안겨주었었다. 보석같이 다루고 싶다가도 한걸음만 나서면 무너뜨리고 싶었다. 평정을 가장한 것인지,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흔들려 손을 뻗어 그녀에게 닿을라치면, 내 욕심스런 생각을 그녀는 한 치도 모르는 것처럼 내게 미소를 지어오고는 했었다. 나는 숨을, 욕심을 삼키고는 웃어주었었다. 물에 젖은 풀잎 같은 미소는 언제나 좋았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오두막은 주저앉아 있었다. 그 성기어진 지붕과 삐걱대는 기둥은 이제 사람이 기댈 곳이 아니었다. 나무 썩어가는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곳에 내 기억 한 겹만 덧씌우면 될 일이었다. 끌어안고 온 기억이 그렇게 쉬이 실망할 것이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조차 하지 않았을 터다.

그 날, 배에서 내려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날은 갑자기 날이 흐렸었다. 걱정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그저 즐거워만 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짠 내음이 난다며 높은 구두를 신고 앞서 뛰어나간 그녀를 쫓아 뛰어갔었다.

 

「가자!」

「어딘 줄 알고 그렇게 뛰어가는 거야, 다쳐! 뛰지 마!」

「빨리 와! -어?」

 

아차, 하는 사이 기어코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졌다. 하필 가게 하나 없는 한산한 곳이었다. 그 때 발견한 것이 이 오두막이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조차 감사하며 뛰어들었지만 그 때 나는 한껏 심통이 났었다.

 

「조금만 천천히 갔더라면 비 맞을 일도 없었잖아!」 내 윽박에 그녀는 대뜸 함박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

「너무 좋아서. 비 맞아서 짜증은 나는데,」 그녀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비가 팔뚝을 타고 흘러 팔꿈치에서 떨어진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어. 그런 기분이야. 빗소리만 가득해서.」

 

비로소 나는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외투를 벗어 어깨에 둘러주며 또 나는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아, 진짜.」

 

다 젖었다며 투덜대는 그 목소리에 아예 등을 돌려 앉아버렸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고개 돌리고 있어? 화 많이 났어?」

「화 난거 아니야.」

「그럼 이쪽 좀 봐봐, 왜 그렇게 등 돌리고 앉아있어?」

「민망하니까 저쪽 보래도!」

 

그제야 그녀는 얌전히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찰나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깨 위로 그녀의 머리가 툭, 기대왔기 때문이다.

 

「고마워.」

「…….」

 

나는 대답하지 않았었다.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때야말로 비로소 그곳에는 그녀와 나밖에 없었다.

그 숨소리와, 숨냄새와, 어깨와 팔뚝으로 건네져오는 체온.

비가 갠 뒤에도 우리는 오래도록 그 곳에 앉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녀와 앉아있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쓸어본 그 곳에는 체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도 또렷한 기억은 머리 속에 남아있을 따름으로, 그것이 더 없이 슬퍼 나는 카메라에 낡아버린 오두막을 담고서 뒤돌아 걸어 나오고 말았다.

 

해변 아무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충분했다.

숙소만큼이나 낡아버린 파라솔과 의자에 걸터앉아 울렁이는 바다를 멀리 바라보며 울컥 치밀어오는 것을 삼켰다. 혼자 앉은 내가 외로울 따름이었다.

주름진 손등과 낡은 카메라는 흑백 빛바랜 사진처럼 시간에 퇴색된 그대로다. 곱씹기에도 너무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저 외로웠을 뿐이었는데. 그녀도 그저, 그녀대로 외로웠을 뿐이었을 것을. 건너뛴 시간은 너무도 공허했다.

 

주저앉은 벤치에서는 짠 바다 내음과, 낡은 플라스틱 냄새가 밀려온다.

하늘은 비가 오지 않은 채로 바다 건너부터 뿌옇게 햇빛이 번져오고 있었다.

다시는 똑같은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부딪히지도 못할 채로 망가져버린 사랑은 물얼룩처럼 가슴에 번져있다.

아득하게 추억하는 그녀에게 끝까지 건네지 못했던 말을 또 가슴 속으로 삼키며 눈을 감았다.

흐릿하게 눈물에 번져버린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다시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질 않았다.